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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Feb 29. 2024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자기혐오, 자기비하, 그리고 침묵의 쇠말뚝이 내 허리에 박히고 있었다

        

나는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만 공포영화나 귀신영화를 잘 못 본다. 보더라도 몰입하지 못하거나 졸아버리기 일쑤다. 내가 사는 현실이 이미 공포요 괴기인데 영화까지 그런 걸 보냐, 그게 내 진심이다. 공포는 내게 결코 즐길 거리가 아닌 고통이기 때문이다. 영화 <파묘>를 보면서도 아니나 다를까 졸고 말았다. 결코 단순 공포영화가 아닌데도 말이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파묘>에서 내게 꽂힌 한마디다. 예고편에서 궁금증을 자아내던 ‘험한 것’의 정체는 여우로 상징되는 일본의 악귀였다. 호랑이 한반도의 허리에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 한 여우를 보았다. 이게 역사적 사실이건 아니건, 영화는 그 악귀와 싸우는 한국인의 정신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한국의 풍수와 음양오행을 미신으로 폄하하는 게 여우의 시선임도 볼 수 있었다.    

  

나는 범, 호랑이 이미지를 아주 좋아한다. 내가 범띠라서다. 그러나 드센 여자로 찍히지 않으려 긴 세월 나는 범 이미지를 지우며 살았다. 범의 허리를 끊으려는 여우는 내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었다. 여우는 변신으로 자기를 감춘다. 자기혐오, 자기 비하, 그리고 침묵의 쇠말뚝이 내 허리에 박히던 때가 있었다.          

     



부르심과 택정함?     


‘사마리아 여자’들의 목자로 살겠다는 말은 뭘 모르고 한 소리였다. 궁금하고 재미난 것은 교회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공 공부나 학과 활동엔 여전히 어정쩡했지만 독서 동아리에서 토론하고 술마시는 건 재미있었다. 교회는 크리스마스 연합예배에, 3학년 봄에 잠깐, 사라졌다가 가을에, 가뭄에 콩나듯 드나들었다.  

   

3학년 가을이 문제였다. 어느새 4학년이 다가온다 생각하니 스산하고 우울한 기분을 어쩔 수 없었다. 담임 C가 로마서 공부에 초대했을 때 나는 기분전환 기회로 받아들였다. 나를 붙잡아 두려 했을까, 그는 내게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했다. 정치외교학을 큰 공부라 하는가 하면, 신앙과 지성을 겸비한 여성지도자 감이라며 “사도바울 같은 하나님의 외교관”이 돼라 했다.      


C가 나를 인정하는 것 같아 재미있게 로마서를 공부했다. 몇 주 과정이 끝났을 땐 기꺼이 소감도 썼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 1장 1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적용했다. 나는 예수의 종이니 예수를 왕으로 따르겠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하나님 나라 외교관, 사명인으로 살겠다. 그리고 일생 복음을 전하겠노라 썼다.    

 

그렇게 나는 혜성처럼 나타난 ‘목자’가 되었다. C가 내게 학생 리더 '보직'을 하나 맡기는 바람에 매주 예배에도 참석했다. 4학년이 되며 신입생들을 만나러 쓸려 다니다 보니 전도와 일대일 성경공부 '활동가'가 돼 있었다. 사람 좋아하고 대화 좋아하고 배움 좋아하는 내가 아닌가. 의미있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후배들이 나를 좋아하고 따르니 나는 귀 기울여 들었고 마음을 주고 영감을 나누었다. 웃고 떠들고 힘을 얻었다. 저녁 기도 모임, 소감 모임, 주말 모임에도 빠지지 않는 '주류'가 되었다.      


그럴수록 학과 활동은 더 멀어지고 수업에 빠지는 날도 늘어갔다. 래에 대한 고민이 사라져 버렸다. 공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람들의 진로가 단순해 보였기 때문이겠다. 국내 취업하고 학사가정으로 헌신하는 길, 또는 대학원을 거쳐 유학생 선교사로 나가는 길. 그런데 졸업한 여자들은 전공 불문 모두 주부였다. 센터에선 이들을 '사모님' 목자라 했다. 자녀 양육을 하며, 기도, 학생 전도와 돌봄, 모임에 음식 준비, 손님 대접 등으로 바쁜 사람들이었다. 유학생 선교사로 가는 사람도 모두 남자였고 여자는 그의 돕는 배필이었다.


눈치 9단인 나는 여자의 미래를 스캔하고 말았다. 결혼에 별 뜻도 없었으면서 결국 결혼하면 모든 걸 버리게 될 걸 알았다. 꿈을 추구하면 사명에 방해만 되고 이중으로 힘만 들 것이었다. 죄사함, 구원, 부르심, 택정함, 사명. 여기 도취되어갔다. 사마리아 여자라는 납작한 자아로 나는 '죄인' 이었고 늘 회개생활을 했다. 그럴수록 나는 하찮고 다른 사람 '섬기는' 일만 중요해졌다.


  


            

니가 지금 제정신이가?

        

“못 간다. 가긴 어딜 가. 니 죽고 내 죽자!”     


내 사는 꼴을 결국 엄마가 알아버렸다. 여동생과 자취하는 집에 엄마가 들이닥치더니 잠도 안 자고 새벽에 깨어났다. 내가 가방을 들고 나가려 하자 가방을 잡아당기며 엄마가 소리를 쳤다. 내가 저항하자 같이 죽자고 막아섰다. 나는 더 세게 엄마 손에서 가방을 빼앗았다. 가방 끈이 찢기는 소리가 났지만 밖으로 내달렸다. 가방 한쪽 끈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1985년 늦가을, 대학 4학년 어느 새벽이었다. 다섯 시 반이면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새벽기도에 가는 길이었다. ‘일용할 양식’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게 ‘목자’의 하루 시작이었다.  나와 성경공부하는 ‘양들’을 위해,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해, 그리고 엄마를 위해 기도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종교에 빠진’ 딸을 말리려 기습 상경한 것이었다. 나 때문에 엄마는 눈물흘렸고 나는 눈물로 엄마를 '위해' 기도했다. 이 시험을 이기고 목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그날도 1,2교시 수업 없는 후배를 시작으로 종일 일대일 성경지도를 했고 후배들의 고충을 들어 줬다. 하루해가 저물어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나는 광신자인가? 엄마의 시선을 마주하자니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도와주소서. 엄마를 잘 돌려보낼 지혜를 주소서. 엄마 맘을 돌보소서….”


한숨으로 기도하며 부엌문을 열었다. 자취집은 부엌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는 구조였다.

“하루 종일 성경공부만 하면 장래는 우쨀라고 그러노?”

내가 오늘도 수업 빼먹은 걸 어찌 알았을까. 화난 엄마 목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방문을 여니 드러누워 있던 엄마가 벌떡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가 앉지도 않고 말했다.

“이제 저를 좀 포기하세요. 엄마가 기대하는 딸로 살긴 어려울 거 같아요.”

준비한 말은 아닌데 내 진심이었다.

“니 지금 뭐라 캤노. 니가 제정신이가.”


나는 냉정한 마음인데 엄마는 더 흥분하고 있었다.   

“니가 우째다가 이 지경이 됐노 말이다. 니가 돈 벌어야 우리집도 살고 니 동생들도 살지. 내가 뭐가 씌어서 니를 대학까지 보냈더노. 경대 가라는 말 안 듣더니 이 꼬라지 될라꼬 서울 왔더나. 교회에 미쳐서 장래도 없고 집안도 없나 마. 시집은 우째 갈라꼬…”

그랬다. 엄마가 내게 기대한 건 ‘살림 밑천’ 큰딸 역할이었는데, 그게 무참히 깨지니 엄마는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나는 이때다 하고 더 냉정하게 말했다.

“제가 예수님 제자로 산다잖아요. 엄마도 예수 믿잖아요. 제 부르심을 따라야죠. 졸업 후엔 대학원 갈 거고 선교사로 살 거예요. 그러니 제발 저를 하나님 뜻에 맡기세요….”     


전에도 흘리긴 했지만 이렇게 엄마한테 대놓고 말하다니. 목이 메지도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미안한 마음도 별로 없었다. 내 태도가 하도 분명해 보여서일까, 엄마의 신앙 양심일까, 엄마는 좀 누그러지고 있었다. 솔직히 전공에 길을 잃어버린 나로서 대학원 소리는 좀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학위나 성공을 위해 가는 건 아니고 후배들을 전도하고 제자양성하려는 목적이다, 그런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신실한 집사라는 사람이 선교사로 살겠다는 딸을 뜯어말릴 명분이 모자랐을 것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자식한테 둔 욕심을 내려놓으시라고. 나를 딸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보시라고. 나를 주님께 내놓으시면 우리집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거라고. 엄마는 내 찢어진 가방을 빼앗아 땅에 패대기쳤다. 찢어진 틈으로 성경책이 삐죽이 보였다. 너덜거리는 가방 한쪽 끈을 엄마는 마저 찢어발기곤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 쳤다. 말없이 엄마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꼭 목자 해야 예수님 제자라더나. 취직하고 돈 벌고 평범한 교회생활하는 길도 있잖아. 돈을 벌어야 먹고 살고 시집도 가고 그러지. 양만 치고 선교만 하면 우째 먹고 산다노. 너그 아부지는 남의 빚보증 뒷감당하느라 날 고생시키더니 니는 예수 믿는다고 날 실망시키나. 내가 예수 믿지 마라는 게 아니잖아….”     


이제 엄마는 부드럽게 나를 달래고 있었다. 시집 걱정하는 엄마한테 결혼 생각 없다는 말까지 덧붙이진 않았다. 지난번에 이미 했으니까. 아버지 같은 남자 만날까 겁나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서라고. 사마리아 여자에게 결혼은 어울리지 않는 길이었으니까. 사르트르와 보봐르 같은 <계약결혼>이라면 몰라도.




버리면 100배로 받는다?


엄마는 다시 드러누웠다. 이미 12시가 지나고 있었다. 좁은 자취방에 세 모녀가 끼어서 잤다. 다음 날 새벽에도 나는 새벽기도에 나갔다. 그날 담임 C가 나를 불러 성경구절을 읽게 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그랬다. 그곳엔 부모를 '떠나' 사명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날 마음으로 엄마를 버렸다. 핍박은 덤이요 후에 백배로 받을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날 내가 버린 건 엄마만이 아니었다. 전공도 공부도 꿈도 버려지고 있었다. 개성도 내 목소리도, 인간에 대한 연민도 이해 마저도 버려지는 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진다는 환상에 취해 어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고 있는지 그때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날 밤 자취방에 오니 엄마는 없고 쪽지가 한 장 있었다.

“잘난 딸년들 잘 살아라. 에미는 떠난다 찾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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