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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Feb 26. 2024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울고 싶지

대학 첫 학기, 나는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입니까     


영화 <서울의 봄>은 내가 여고 1학년 때 일어난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군사반란 이야기다. 대구에 살던 내가 아무것도 몰랐듯 학교도 선생님들도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 못했고 말해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성공’한 ‘혁명’으로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건 내가 고3 때였다. 역시 어떤 선생님도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내가 들은 건 ‘정의 사회 구현’이었고 광주는 ‘불순분자’와 ‘폭도’라는 말뿐이었다.


1982년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대통령은 전두환이었고 졸업할 때까지도 그랬다.  대학 새내기 생활을 시작한 3월 하순 어느 날 부산 미국 문화원을 대학생들이 방화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데 그들이 했다는 주장은 내게 더 충격적이었다.     


“미국은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그때까지 내가 아는 미국은 세계 최강 민주주의 나라였고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우방이었다. 그런데 봄학기 내내 캠퍼스는 ‘반미’와 ‘광주’ 이야기로 들끓었다. 학교 어느 건물 어느 공간에 가면 광주에 대한 영상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선배들이 보러 오라고 할 때마다 나는 망설였다. 너무 궁금한데, 나는 아직 빨갱이와 가까워질 준비는 안 되었다 싶어 가지 못했다.

    

“전두환은 물러나라!”

“미국은 물러가라!”     


어느 날 학과 선배가 이런 구호가 가득한 ‘전두환은 광주 학살범’이라는 유인물을 내게 쥐어주었다. 그리곤 사과(사회과학) 모임’에 올 때가 되지 않았냐고 했다. 그동안 무서워서 피하고 싶던 선배에게 콕 찍힌 기분이었다. 고시반에도 학과 생활에도 소속감 없이 겉돌던 나는 적잖이 당황하며 며칠을 고민했다.


용기를 내 학회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열 명쯤 되는 남자들이 토론하고 있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뒤에 앉아 들었다. 시국 이야기를 어떤 어려운 책과 함께 하는 것 같았다. 심각하고 열띤 분위기인데 여학생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처럼 밤새워 토론하는 대학생활을 꿈꾼 적도 있지만 거친 남자들 속에서 토론할 자신은 없었다. 나를 발견한 선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어이 화숙이 왔어? 눈에 힘 좀 빼지 그래?”

     

그랬다. 나는 세상이 만만찮아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학회실에 다시 가지 않았다. 그 선배의 말투도 무서운데, 읽어야 하는 책 목록에 기가 질려서였다. 아, 내가 아는 책이 한 권이라도 있었으면 용기를 냈을까. 속 빈 강정으로 드러날 게 두려워 나는 아웃사이더의 길을 고수했다.     


           



여자는 고시 붙어도 차 나르는 거 알지?   

  

고시반에서라도 소속감을 느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대입 지옥을 이제 막 빠져나왔는데 다시 고시생으로 4년을 매여 산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더구나 속을 터놓고 수다떨며 전공과 진로를 의논할 대상이 없었다. 90% 이상이 사법고시생인 고시반에서 같은 과 친구도 선배도 만나기 어려웠다. 나를 딱하게 여긴 같은 방 법학과 언니가 어느 날 고시반에 딱 한 명 있다는 우리 과 선배를 소개해 주었다.

     

복학생인 선배는 나를 학교 밖 식당으로 데려가 밥을 사주고 술도 사주었다. 나를 어린 동생인양 지도해 주고 싶은 눈치였다. 그는 외무고시에서 행정고시로 방향을 바꿨다며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외무고시 합격한다고 외교관 되는 거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야.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여자는 고시 붙어도 차 나르는 일부터 한다는 거 알지? 뽑는 수도 워낙 적은 데다 제2 외국어까지 해야 해서 힘들지. 꼭 외무고시 볼 거냐?…”     


여러 말 중에서 내 귀엔 “여자는 차 나른다”는 말만 콕 박혀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고시반에 들어온 것도 창피한데 내가 갈 길에 대해 아는 것도 고민한 것도 없다는 게 드러나고 말았다. 기가 팍 죽어 묻고 싶은 말이 하나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뜬구름 잡는 촌뜨기를 참교육하려는 듯 선배가 쐐기를 박았다.   

   

“네가 모를 거 같아서 하는 말인데, 우리나라는 그래. 여자는 어디 가나 차 심부름해야 한다는 건 알아 두는 게 좋아. 그러니 꼭 외무고시 볼 이유가 있냐. 다른 여학생들처럼 사시나 행시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다. 제2외국어는 뭐 할 건데?…”

가진 적도 없던 어떤 환상이 미리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지고 있었다.  

    

선배는 그다음 일요일 다시 나를 보자고 했다. 따라나섰더니 시내의 한 영화관에 도착했다. 영화를 보게 될 것도 무슨 영화를 볼지도 전혀 모르고 갔는데 영화가 1979년 깐느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남과 여>였다. 정사 장면 가득한 프랑스 영화를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 선배와 나란히 앉아 보았다. 그나마 음악도 배우들도 프랑스어도 아름다워서 견딜만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며 선배가 한숨을 쉬며 푸념하듯 말했다.  

   

“아이고 니 옆에 앉아서 내가 참느라고 무지 고생했다. 아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울고 싶지  

   

고시반 기숙사는 1년 365일 고시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는 섬이었다. 고시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날씨가 어떻든, 꽃이 지든, 데모를 하든 상관없어 보였다. 매일, 매주, 매달, 계획표대로 공부가 돌아갔다. 그곳에서 내 책상은 늘 비어있었고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나는 세상이 궁금했다. 이게 과연 내 길인지, 고시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알 수 없어서였다.     


1학말이 다가오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오전에 고시반 신우회 예배를 간 적도 있지만 재미가 없어 그만둔 지 오래였다. 그런 선배들을 피하고 싶었고 교회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외출이 답이었다. 빌딩 숲을 쏘다니며 하루를 보낸 적도 있었다. 유명한 교회며 성당을 하나씩 구경했다. 어느 일요일은 큰 서점에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그날은 이른 아침 조용히 기숙사를 빠져나가 여의도까지 가 세계적인 대형교회를 구경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내릴 즈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 없이 캠퍼스를 걸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를 피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기숙사에 들어갔을 땐 몸에서 물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방에 들어가니 라디오에서 인기가요 ‘고추잠자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 봐 그런가 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슬퍼지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울고 싶지.     


가을빛 물든 언덕에

들꽃 따러 왔다가 잠든 나.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하필 노랫말이 딱 내 마음이었다.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울고 싶지. 엄마야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좋아하는 조용필의 목소리에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랬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창가에 기대어 물이 뚝뚝 흐르는 몸으로 창밖의 비를 보고 한참 서 있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내 앞엔 세 가지 정도 길이 보였다. 1. 고시반에 남아 눈 딱 감고 고시공부한다. 2. 고시반에 남되 학회 토론과 데모에 적극 참여한다. 3. 고시반을 나가서 진로를 다시 생각한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 나는 3번을 택하고 고시반에서 짐을 쌌다. 성남에 사는 언니네서 한 학기 통학하며 새로운 대학생활을 꿈꿔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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