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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04. 2024

보도지침 또는 소감지침

이 사람이면 좋겠다, 그가 말하는 그 사람은 나임에 틀림없었다.


영화 <1987>을 볼 때마다 내가 한결같이 꼽는 명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교회 건물 스테인드글라스 창밖에 매달린 김정남의 그림자다. 화면을 채운 알록달록한 창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이 그려져있다. 그 그림 뒤에는 도망 중인 민주화 투사의 그림자가 겹쳐 어른거리고 있다. 도대체 예수 십자가는 무엇이며,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란 무엇이냐, 대사 하나 없이도 무수한 질문을 날리는 장면이었다.     


또 하나는 한 신문사 편집부 벽에 걸린 ‘보도지침’이다. ‘서울대생 사망 절대 보도 금지’를 시작으로 칠판 빼곡히 적힌 지침을 편집부장이 지워버리고 소리지른다. “경찰 고문으로 대학생이 죽었는데 씨발 보도지침이 대수야? 앞뒤 재지 말고 들이받아!” 보도지침을 폭로한 언론인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1995년에 가서야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악명 높은 보도지침, 과연 그때만의 이야기일까?   

   

나는 1987년에 도망자는 아니었지만 독재타도를 외치지도 못했다. 보도지침을 따라 ‘받아쓰기’하는 기자는 아니었지만 권력에 분노하며 들이받지도 못했다. 소심하고 부끄러운 내 청춘을 <1987>이 위로하고 지지해주었다면 말이 될까? 권위주의, 통제, 억압, 이건 내게도 너무 익숙한 그 시절의 일상이자 공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공기 속에서도 사랑이 싹트고 있었으니, 청춘은 청춘이로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987년 여름은 지독하게 덥고 비가 많이 내렸다. “독재타도 호헌철폐”에 밀려 노태우가 개헌과 직선제를 약속한 6월 29일은 장마 시작이었다. 혼수상태에 있던 이한열 군은 결국 7월 5일에 사망하였다. 민주화의 열기로 “세상이 뒤집혀” 그 해 여름은 더 뜨겁 더 습했다.

    

선교 단체의 여름은 오직 여름수양회로 뜨거웠다. 캠핑이나 휴가를 상상하면 큰 오산이다. 봄학기 동안 오고 간 어린 신자가 신앙이 다져지고 정규 멤버가 되는, 1년 중 가장 큰 영적 이벤트였다. 리더들에겐 한 학기 ‘양 농사’의 기말고사이자 ‘지상명령’의 수행이었다. 누구를, 얼마나 데려갈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요양에서 돌아온 후 여름수양회까지 내겐 두 달의 시간뿐이었다. 조급한 내 형편을 알았을까, 담임 C가 어느 날 10만 원이 든 봉투를 주었다. 요즘 말로 열정 페이, 직장 안 다니고 양만 돌보는 ‘풀타임’에게 주어지는 사례비였다. 나는 얼결에 '유급' 목자가 되어 새벽기도부터 밤늦게까지 더 충성했다. 다행히 후배들은 나를 따랐다. 혼란하고 뜨거운 시대, 목마른 청춘들이 줄을 이어 내게로 왔다.      


내가 목자로서 처음 섬긴 85학번 제자들이 자라고 있었다. 86학번팀에도 내 일대일 양들이 굳게 세워지고, 어린 양들은 친구들을 내게 소개해줬다. 87학번 양들도 여름수양회에 일찌감치 등록해 주었다. 마치 젖먹이부터 학령기까지 줄줄이 애 딸린 엄마처럼, 제자양성가로 나는 '믿음의 어미'란 소리를 들었다.     


7월 하순 여름수양회 기간은 아직 장마철이었다. 충청도 시골교회당에서 뜨거운 습기에 척척 감기는 3박 4일. 예배당이 낮엔 프로그램 장소 밤엔 남자 숙소로 쓰였다. 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쩍쩍 붙는 바닥에서 모기에 뜯기며, 땀 흘리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이었다. 다섯 명의 어린양들을 돌보며, 서빙 등 업무분장으로,  나는 수양회 기간 서너 시간 자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예수를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영혼을 보는 즐거움을 어디에 비하랴. 몰입과 몰아의 헌신이었다.      

         



소감지침이 있었다     


수양회가 끝난 다음 주말엔 리더 소감모임이 있었다. 양들에게 어떤 은혜가 있었는지, 나는 무엇을 배웠는지, 수양회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수양회 마지막 강 요한복음 21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근거한 글을 써서 나누었다. 요한복음 21장은 내가 사랑하는 성경 문학 중 하나였다.


부활한 예수는 ‘도망간’ 제자들을 찾아 갈릴리로 간다. 물고기를 다시 잡게 도와주고, 떡과 생선으로 아침을 먹인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묻고 “내 양을 먹이라” 부탁한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법. 예수의 물음은 사랑고백인 셈이다.


예수는 같은 질문을 세 번 하고 같은 부탁을 세 번 반복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를 사랑한다면 그의 양을 돌보라, 결론은 명확했다. 나는 눈물로 그의 사랑에 감사했고 사랑을 고백했고 '죄'를 낱낱이 고백했다.  

“주님 사랑합니다. 제게 주님의 양들을 맡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양을 먹이겠습니다. 제 장래도 결혼도 주님께 맡깁니다. 저를 사용하소서."

"저는 사명을 피해 다니던 죄인입니다. 목마름을 술과 세상 남자들로 해결하려다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디테일을 차마 다 담을 수 없어 다음 책에 쓰기로 했다. 독자의 이해를 바란다.) 주님의 성전인 몸을 함부로 해서 병이 났습니다. 거룩한 사명에 부적합한 죄인입니다."


소감은 자유로운 감상을 쓰는 글이 아니었다. 그랬다. 거기엔 '소감지침'이 있었다. 자기만의 비평이나 시국 이야기를 쓰는 건 암묵적인 금기였다. 주어진 텍스트에 근거해 믿음을 고백하고 죄를 회개하는 글이어야 했다. 지침에 맞는 소감을 쓰기까지 사람에 따라선 여러 번 퇴짜를 맞는 경우도 있었다. 더 크게 감사할수록, 더 철저히,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이라고 쓸수록 좋은 소감으로 인정받았다.


 소감 발표가 끝났을 때 담임 C가 코멘트했다.      

“드보라는 똑똑한 죄인인 걸 잊으면 안 돼. 자유분방하고 언변이 좋으니 양들도 따르지. 형제들의 마음을 뺏기 쉬워. 그러니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를 자랑하기 쉬운 죄인인 걸 기억해야 해. 어떻게 해야 내게서 주님의 영광만 드러나게 할까, 그걸 투쟁해야 해…”     

그땐 언어가 없어  가스라이팅인 줄 몰랐다. 내 장점조차 다 로 낙인찍는 악마의 목소리인 줄 상상도 못했다. 나는 형편없는 죄인이어야 했다. 믿음있어 보이고 싶고 영적으로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말없이 받아들이는 아멘! 속에 내가 납작해져가는 줄 그땐 몰랐다.




그런 고민 안 해요?     


그날 늦은 밤이었다. 센터 문을 나섰다가 1층에 둔 우산을 가지러 돌아가야 했다. 같은 학번 졸업생인 덕이 혼자 뭔가를 쓰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나를 보고 반색하며 말했다.

“소감 쓰고 있었어요.”

아니 무슨 소감을 또? 되묻는 내게 그가 말했다. 담임 C한테서 소감 다시 쓰라는 명이 떨어졌다고. 동기 남자 목자들 모두 다 다시 쓰게 됐다고 했다.

“어쩐지 소감이 좀 미달이긴 했지.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더라니, 역시 그럴만했네요.”


내가 놀려주듯 말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잠깐, 자매들은 안 그래요? 형제들은 이번에 M선배 결혼하는 거 보며 심각했거든요. 안 놀랐어요? 원하지 않는 스타일의 자매를 소개받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거냐, 그런 얘기했는데. 속마음이 들킨 거 같아요. 소감 다시 쓰라는데 너무 안 써져요.”

나는 살짝 당황하고 있었다. 남자들끼리 그런 이야기까지 한다는 게 놀라웠다. 예수만이 내 사랑, 예수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는 나와 그는 달라보였다. M은 자기보다 몇 살 많은 자매를 소개받고 바로 아멘! 결혼해 선교사로 나간 남자 선배였다. C가 중매하면 M처럼 기쁨으로 '순종'하면 단체에선 ‘믿음의 결혼’이라 했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요? 믿음의 결혼을 못 믿는 믿음 없는 사람들이네요.”

내가 농담으로 웃고 멀어지려는데 덕이 나를 잡듯 다시 말했다.

“고민 안 돼요? 형제들끼린 어떤 자매를 소개받는다면 못 받아들일 거 같다, 서로 말하거든요. 누구는, 제발 저 사람만 아니면 좋겠다, 그래요.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누구면 안 된다가 아니라 꼭 이 사람이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기도 안 해요?”     


내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태연한 척 더 과장된 농담으로 받았다.

“아이구, 그러니 소감을 빠꾸 당하지. 형제들 안 되겠구먼. 더 빡쎄게 훈련받아야겠네요.”

덕이 더 이야기를 이어갈까 무서워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내 가슴이 마구 쿵쾅거리고 있었다. 다리도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할까. ‘꼭 이 사람이면 좋겠다’, 그걸 왜 굳이굳이 나한테 털어놓았을까. 그의 눈빛과 표정과 태도만으로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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