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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07. 2024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나니

창호지를 뚫어 신방을 훔쳐보던 옛 풍습이 느닷없이 이해되지 않디?

### 순서에서 빠뜨린 꼭지를 늦게 올립니다. 브런치북 연재 순서상 6번과 7번 사이에, 종이책 목차론 제 2장에 4번째 꼭지가 될 것입니다.


    

생각하는 사람, 스물여덟 살 숙에게

     

때로 책 한 권보다 사진 한 장이 더 진실을 잘 보여주는 경우가 있지.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 구경할 때의 느낌 알잖아? 한 장소 한 장면으로 시대의 정황과 맥락을 담아내는 사진처럼 진실을 포착해내는 글을 쓰고 싶구나. 지금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이 그래. 34년 전의 숙이 살던 시간과 공간으로 단번에 데려가는 것 같아.     

 

무슨 사진이냐고? 사진에 찍힌 날짜부터 주목해 볼게. 1990년 9월 28일이야. 이날 네가 어디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겠어? 그래, 네 결혼식 4일 후, 아직 신혼 첫 주였잖아. 신혼여행 2박 3일 후 영덕 친정에서 1박 찍고 밀양 시집으로 가서 한밤 잔 그다음 날이었지. 뭐 하는 장면인지 알아 맞혀 볼래?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이 되려     


젊은 숙아! 새색시 네가 설거지에 열중한 사진에서 내 눈이 도무지 떨어지지가 않아. 


노랑 저고리에 분홍치마 깨끼 한복에 까만 단발머리를 뒤로 감싸 묶은 스물여덟 숙이가 시집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하네? 볼살도 있고 걷어 올린 소매 밑에 보이는 손목도 통통해 보여. 그땐 고무장갑이 귀했겠지? 맨손이구나. 가지런한 앞머리로 덮인 이마 아래 두 눈은 땅으로 향하고 입은 꼭 다물고 있구나.  

    

네 뒤 저만치 담장 아래엔 땔감 나무가 쌓여 있고 네 오른쪽 옆은 헛간벽이구나. 거기엔 체와 소쿠리 등이 걸려있고 시골 살림 도구들도 여기저기 보여. 네 왼쪽에 수도꼭지와 어른 목욕도 가능한 큰 고무통이 있고 그 앞에 그릇이 담긴 고무대야가 있고 그 뒤에 네가 쪼그리고 앉았구나. 씻어놓은 그릇들이 작은 소반 위에 쌓인 걸 보아 설거지가 많은 것 같지?     


아, 갓 결혼한 새댁이 처음 신행 오자마자 시집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했구나. 박물관에 전시된 옛 생활사 유물처럼 보인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조선시대라도 좀 낯설지 않아? 저 시간 대청마루에선 신랑 가족들과 친지들이 하하 호호 차담을 나누고 있었잖아. 신랑도 그들 중에 있었고. 자기 집에 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어. 심심해서 일하는 색시를 향해 셔터를 눌렀겠지. 이상하지?      


신랑은 왜 같이 설거지를 안 했을까? 너는 왜 그런 생각도 안 했을까? 가족들은 왜 너를 말리지 않았지? 네가 하겠다고 했겠지 물론. 낯선 집 낯선 사람들 속에 너는 2박 3일을 앞치마 두른 여자로 쪼그리고 지냈단 말이야. 착한 며느리, 좋은 색시로 보이고 싶었어? 예수 믿는 며느리의 사랑과 헌신을 보여줬어?    

  

그래, 큰며느리 좋다고 흡족해하는 어른들 앞에 너는 더 잘하려 했겠지. 곧 선교사로 떠날 몸이라 미안해서 더 그랬을 거 같아. 하긴 사돈의 팔촌까지 눈을 씻고 봐도 예수쟁이가 없는 집이었지. 장남 장손 덕이 예수쟁이가 된 것도 모자라 선교사니 목사 한다니 가문의 소동이었겠지. 이제 봉제사는 어찌 될 것이며, 조상님 낯을 어찌 보냐 걱정하던 어른들에게 새 며느리는 기쁨이 되기에 충분했구나. 

      

너는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으로 '훈련되고' 있었어. 남자와 여자는 역할이 다르게 창조되었다고 귀가 닳도록 배웠지. 어릴 때부터 동생 업어 키우고 집안일 잘하는 장녀처럼 자란 것도 모자라 선교 단체에선 하루아침에 '믿음의 어미'가 되길 요구받았지. 자기를 버리고 낮추고 섬기라, 목소리를 죽이고 “남을 세우는” 어미가 되라 했지. 그렇게 쪼그리고 설거지하니 예수가 더 잘 보이디?     


             



그림자로 태어난 존재는 없지


쪼그려 앉아 예수를 생각하려 노력했겠지 물론. 


그러나 동시에 네 속에선 다른 질문이 올라왔잖아.  “나는 이 집에서 뭘까?” “덕에게 나는 뭘까?” 도대체 그딴 어려운 질문이 왜 거기서 나온다니? 덕을 사랑하고 도와주기로 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냔 말이야. 허리가 아프고 삭신이 고단했지? 변비와 두통으로 몸이 시비를 걸어줬잖아. 그런데 그곳의 그 누구도 심지어 너 자신조차 네 마음이 하는 말을 잘 못 알아들었던 거 알지? 


밀양 옛집 구조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했지? 낡은 본채와 아래채가 마당을 감싼 “ㄱ”자 한옥이었지. 본채엔 부엌과 방 두 개가 마루로 이어져 있었고 아래채엔 마루 없는 사랑방과 외양간이 있었어. 그 모퉁이에 재래식 변소가 있었지. 구더기가 득실대고 냄새가 진동하는 똥통이었어. 화장실 한 번 가려면 치렁대는 한복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잖아.    

 

시어머니야말로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이었고 그림자의 대명사였지. 하루 종일 도무지 쉬는 법 없이 일하는 그분을 네 시선이 따라다녔구나. 뭐라도 거들려 애쓰며 말이야. 수돗간으로 부엌으로 부엌에서 헛간으로. 텃밭에서 푸성귀를 가져오고 마당 한쪽에서 다듬었지. 부엌 문지방은 왜 그리 높으며 오르내릴 죽담과 댓돌은 왜 그리 많은지. 앞치마로 동여매도 한복은 치렁대고 몸에는 땀이 흘러내렸지. 

      

신랑은 한복 벗어던진 거 기억하지? 얇은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잖아. 왜 너는 한복을 벗어던질 생각을 못 했을까? 걸리적거리니 갈아입겠다거나 갈아입으란 말이 왜 안 나왔을까? 생각해 보렴. 특별한 옷은 신분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 한복은 그 집에서 너의 자리를 보여 준 것 같지 않아? 군기 바짝 든 신병의 제복 말이야.  


땀에 전 몸을 씻고 싶은데 샤워할 곳이 없었어. 결혼식 후 사흘째 영덕에서야 숙덕은 초야를 치른 신혼부부아냐. 이제 서로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살기로한 사람들이었지. 근데 씻을 곳이 없었지. 누구와 이 문제를 의논한들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지. 사랑의 밤을 기다리는 신랑을 또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단 말이지. 나만의 고민이었어.  


젊은 숙아! 그때 네가 느낀 기분은 이상한 게 아니었어. 언어는 없었지만, 며느라기 시작 그림자 노동의 길이 즐겁지 않았던 거야. 질문이 올라오는 건 네가 사람이란 증거였어. 그림자로 태어난 존재는 없으니까. 아무리 합리화해도 네 마음은 소리쳤을 거야. 외롭게 싸운 숙아! 생각하는 사람이었어 너는. 수고했어. 





사랑하면 용감해진다     


너는 차마 시어머니께 어디서 어떻게 씻으면 좋냐 묻진 않더구나. 얌전해 보이려 말을 아끼기도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으니까. 궁하면 통한다, 너는 옛 여인들처럼 뒷물을 하기로 했지. 집안이 고요해지길 기다렸다가 늦은 밤 수돗가에 가더구나. 낮에 설거지한 바로 거기지. 대야를 깨끗이 씻고 물을 받아 넓은 치마폭으로 덮고 씻었지. 샤워를 할 순 없으니 옷고름을 풀고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았고 말이야.  

     

수돗간 물소리가 밤의 적막을 깨뜨리더구나. 누가 깰까 조심조심해도 소용없었지. 무슨 죄라도 짓는 걸까? 그런 생각이 퍼뜩 들어 너는 마음을 바꿔버리더구나. 뒷물하는 새댁의 뒷모습을 누가 본들, 어쩔 것이여, 부끄러워해야 해? 이렇게 말곤 길이 없는데 내 잘못이냐고! 용감해지기로 하더구나. 새댁 뒷물하는 거 구경하건 말건, 정말 그랬지, 사랑하며 살기로 한 너는 당당해지더구나. 그랬지?     


결혼 후 두 번째로 숙덕이 사랑을 나눈 밤이었구나. 숨소리까지 창호지를 뚫고 새어 나갈 허접한 시골집에서 너흰 서로를 안았구나. 조심스러운 척했지만 너는 사랑에 용감한 사람이었지. 한 사람에게 온전히 헌신할 준비가 된 사람이었거든. 존재만으로 서로를 감사하는 두 사람이고 말이야.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는 사랑이 있었구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두려움의 영을 놀려주듯 우리는 속삭이더구나. 


“창호지 뚫고 들여다보는 눈이 있는 거 같아.”

“괜찮아, 보라면 보라지.”

“마루 밑에 숨어서 다 엿듣는 거 아닐까?”

“들을 테면 들으라지. 더 크게 소리 낼까 보다.”

“안방에까지 다 들릴 거 같단 말이야.”

“어때? 아주 흐뭇하게 좋아하실 거야.”     


창호지를 뚫어 신방을 훔쳐보던 옛 풍습이 느닷없이 이해되지 않디? 소심한 가슴으로 7년을 기다린 덕의 마음을 너는 받아들였구나. 결혼은 없었던 일로 하자던 여자도 이제 없었고 속수무책 울던 남자도 없었지. 두 사람은 아낌없이 주고 돕고 지지하며 함께 하리라, 온전한 사랑을 배우리라 기도했구나.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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