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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05. 2024

너희가 아골골짜기를 알아?

마녀사냥도 여성혐오도 주홍글씨도, 그땐 내 언어가 아니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2)   

  

찬송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의 2절 가사다. 주만 따라 어디든, 괴로우나 즐거우나, 심지어 죽음이 막아 서도 주만 따라 가겠다는 고백이다. 아골 골짜기도 소돔 거리도 사랑 안고 가서 아낌없이 다 드릴 태세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후렴이 반복된다. 나도 그렇게 부르던 때가 있었다. ‘아골 골짜기’가 무언지 알기 전까지만 그랬다. 그래, 너희가 아골 골짜기를 알아?  

    

발단은 덕이 한 ‘꼭 이 사람이면 좋겠다’ 한마디였다. 그 말이 1987년 가을에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자유롭게 싸돌아다니던 내가 ‘급전향해’ 목자로 산 지 어언 3년, 연애도 결혼도 주께 맡겼다 생각하던 때였는데, 왜 그가 자꾸 내 맘에 걸리냔 말이다. 센터에서 만난 남자들은 선후배를 막론하고 모두 믿음의 ‘형제’ 아니던가. 그러나 단 한 사람 덕에게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1987년 추석연휴, 나는 고향에 안 가고 서울에 남아 여름 동안 수고한 몸을 좀 쉴 수 있었다. 같은 학번 자매 목자 M과 수다 떨다 내 고민을 털어놓게 됐다. 이게 아골 골짜기로 나를 이끌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나 어떡해     


연휴엔 센터가 조용한 법이었다. 나는 풀타임이라 조용한 센터를 지키고 환경도 돌보고 기도도 하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연휴 사흘째였다. 한산한 서울 거리를 N과 쏘다니다며 놀다 자취집에 들어가 같이 밥을 해 먹었다. 음악이 전공인 친구라 음악도 듣고 음악 이야기도 했다. 모처럼 한가한 시간 덕분에 우리는 더 친해질 수 있었다.    

  

“나 실은 고민이 있는데, 나 어떡해?”


내가 조심스럽게 덕이 “꼭 이 사람이면하더라는 얘기를 털어놨다. 아무래도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힘들다고, 내 직감이라고 고백했다. 솔직히 이미 4학년 때부터 내가 눈치채긴 했지만 전혀 모른척하며 대했다고도 실토했다. 이젠 확인해 버렸으니, 나 어떡해? 조언을 부탁했다.

N이 별로 놀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걸? 내 눈에도 다니엘이 드보라 좋아하는 게 보이던데?”

그랬구나. 그럼 더 심각한 일이었다. 진심으로 덕이 걱정된다고 내가 말했다.   

  

“소감이 잘 안 써진다 그러더라고. 나 때문에 성경 말씀이 그 마음에서 튕겨 나가는 거 아닐까? 내가 그에게 영적인 걸림돌이 될까 너무 무서워. 시험에 들어 실족할까 걱정된단 말이야.”

사마리아 여자의 자격지심이었다. 나는 정말 몹쓸 죄인이 된 것 같았다. M이 별로 심각하지 않게 반응하는 건 의외였다. 빙그레 미소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N이 말했다.

“나도 비밀 하나 고백할게. O가 나를 좋아하는 거 혹시 눈치챘어?”

놀라워라. 금시초문이었다.

“드보라는 그런 거 관심 없구나. 내가 O를 좋아하는 것도 몰랐겠네? 이미 우린 서로의 맘을 알고 지낸 지 좀 됐거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연애가 금지된 곳이었다. 연애감정을 정욕이요 음란으로 회개하라 하지 않던가. 나는 하지도 않은 연애로도 이미 범법자가 되어 떨고 있는데 N은 나와 달리 두려워 보이지 않았다. 여유 있어 보이고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N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부디 덕이 실족하지 않게, 내가 현명하게 처신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그후 나는 N과 O의 연애에 대해선 못 들은 셈 쳤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간과 아골 골짜기  

   

연휴 다음 주말 소감모임 분위기가 이상했다. 흩어졌던 사람들이 돌아와 따로 무슨 회의라도 하고 온 양, 어떤 정보를 그들끼리 공유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였고, 내가 알아채기 어려운 모호한 표현이 소감마다 등장하고 있었다.    

  

“인정받는 목자가 알고 보니 연애를 하고 있어서 실망했습니다.”

“어린양들이 정욕과 음란에 물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지 못했음을 회개합니다.”

“그 목자가 영적 순결을 지키는 믿음의 어미가 되길 기도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 보이는데 누구도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 소감에 나오는 저 모호한 표현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일까, 설마, 그러나, 마음이 뒤숭숭했다.   

   

모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한 학번 여자 선배 P가 나를 따로 불렀다. 덕이 2학년 때 처음 만나 성경공부를 했으니 P는 덕의 ‘일대일 목자’였다. 평소엔 나와 엮일 일이 거의 없던 사람이 왜 갑자기 나를 따로 데려갈까, 내가 N에게 털어놓은 이야기와 관련 있겠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나를 1층 한 구석으로 데려간 P는 책상에 마주 앉기 무섭게 다짜고짜 퍼부었다.     


“양 치라고 풀타임 만들어줬더니 연애질이나 해? 이 어려운 시기에 깨어 충성해도 모자랄 판에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년이 제정신이야? 역사를 말아먹을 년. 형제를 유혹해 실족시킬 년. 한 형제를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을 년인 거 알지?”

더 많은 욕을 들었지만 더 길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P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냐 묻지 않았다. 나 역시 왜 그러냐 묻지 않았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바람에 1년 남자 선배 Q가 나를 불러 앉혔다. 역시 어떤 질문도 없이 엄중한 얼굴로 구약 여호수아서 7장 16~26절을 읽게 했다. 그는 아간이란 사람과 아골 골짜기를 언급하며 나를 죄인이라 했다. 요약하면 이런 이야기였다.


아간은 이스라엘 각 지파별로 뽑힌 리더 중 한 사람이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패배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아간을 추궁했다. 아간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금덩이 하나가 탐나서 감추었다고 자복했다. 여호수아가 보낸 사자가 그것들을 찾아 왔다. 아간은 노략물과 아들 딸 소와 나귀 양들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온 이스라엘이 아간을 돌로 쳐 죽이고 물건들도 치고 불살라 돌무덤을 쌓았다. 그 돌무더기를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른다. 아골골짜기란 '근심 괴로움'이란 뜻이다.

     

Q는 나더러 돌 맞아 죽어 마땅한 아간이라 했다. 하나님을 괴롭게 한 죄로 내가 괴로움 당해 마땅하다, 양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세우라고 맡긴 직분을 자기 정욕을 위해 악용한 죄인이라 했다. 후배들에게 나쁜 본을 보인 죄가 크다. 그래서 센터에 둔 내 책이며 물건들도 다 빼라 했다. 열정 페이도 이젠 받을 자격이 없다 했다.    

  

나는 아간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하며 가만히 있었다. 아간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단체로 나를 돌로 치고 돌무덤을 쌓는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골 골짜기가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내가 단체를 망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엄청난 사람인지 몰랐다. 묻고 싶지도 나를 방어하고 싶지도 않았다. O와 P가 누구의 명령을 수행했는지 지금까지 나는 묻지 않았다. 침묵의 아골 골짜기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날 새벽기도 시간, 지하실 골방에서 답답하고 무거운 가슴으로 무릎을 꿇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묵상에 잠기려 할 때였다. 평소와 달리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크다 싶더니 여기저기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드보라 목자가 정욕과 음란을 회개하고 새사람 되게 하소서.”

“음란 마귀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않도록 주여~ 이곳을 지켜 주소서.”

“드보라 목자가 연애감정과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하고 순결한 주님의 신부가 되게 하소서.”     


드보라 드보라 드보라…. 나는 결국 귀를 막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아직 어두움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은 어디일까. 아골 골짜기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땐 내게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군부독재의 빨갱이 사냥도, 마녀사냥도 여성혐오도 주홍글씨도, 그땐 내 언어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원점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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