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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Mar 28. 2024

살불살조(殺佛殺祖), 화숙이는 복도 많지

분명히 경고합니다. 나한테 그딴 화법으로 말하지 마세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내 인생 후반전을 똑 닮은 영화였다. 거물 감독의 죽음으로 영화가 시작되는 게 무릎을 치게 하는 요소였다. 회식자리에서 지 감독이 픽 꼬꾸라져 급사한다. 그의 밑에서 평생 영화 프로듀서로 일한 찬실은 '멘붕'에 빠졌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깊고 넓은 질문을 평범한 인물들의 '지리멸렬한' 일상에 보물 찾기처럼 숨겨놓은 게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였다.      


“수처작주(隨處作主) 하니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 주인공이 되니. 자기가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곳이다.”


찬실이 소피 방에서 우연히 읽게 된 문장이다. 당나라 시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이었다. 무위진인(無位眞人 일체의 분별에서 벗어난 참사람)',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도 거기 있는 어록이다. 앞서가는 사람을 '고분고분 따르라'가 아니라 '죽여버리라' 가르치니 뒤집힌 세계관이로다. 지 감독의 죽음을 “살불살조”로 읽는 건 관객의 몫이었다.      


이희문이 부르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타령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자식도 남편도 없고, 집도 돈도 없는 찬실이가 복도 많단다. 어떻게? 역시 살불살조 수처작주가 비밀이겠다. 부처입네 큰 선생입네, 주의 종이네, 그런 존재가 찬실이한테서 사라진 것이다. 판을 엎는 후반전, 그래, 화숙이는 복도 많지!          


    

그건 가부장의 화신이었다


나와 N, 그리고 R부부가 25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건 선교단체 후배 W의 초대 덕분이었다. 지방 도시 연구소와 대학에서 일하는 W 부부는 손님 대접과 교제를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널찍하고 편리한 최신식 아파트 큰 창엔 산이 보이고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2박 3일 함께 묵으며 먹고 자고 산에도 갈 예정이었다.    

  

“왔구나~~ 왔구나 왔어!!!”

“초대해 줘서 고마워. 손꼽아 기다리는데 날짜가 너무 안 가서 미치는 줄 알았어.”

“반갑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세상에 세상에! 어쩜 20대 때 모습 그대로잖아.”     


내 나이 54세, 간암 수술 후 3년 차, 직장 사표 내고 본격 자기 주도적 자연치유 생활 2년 차였다. 운동과 독서, 토론과 글쓰기 등, 말하고 글 쓰는 걸 중심으로 살던 때였다. 갱년기 에너지까지 폭발해 나는 벌컥 벌컥 분노하는 여자가 되었다. 지난 삶도, 내 주변도, 심지어 덕과의 관계까지 분노할 대상이었다. 목사 따위, 사모 따위, 다 개나 주라, 인간 대 인간으로 살 수 없다면 이혼하자, 날마다 덕과 싸우던 중에 떠난 여행이었다.     


그건 내 사정일 뿐, 강산이 몇 번 변하도록 못 보고 살던 벗들의 만남은 즐거웠다. 아름다운 이야기 꽃이 피어났으리라. 내 눈이 뒤집힌들, 첫 만남부터 분위기 초칠 일은 없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듯, 식사 준비하는 안주인 W의 손놀림엔 여유가 있었다. 우리는 함께 음식 준비를 도왔고 식탁에 수저를 놓고 컵과 접시를 날랐고 쉼 없이 떠들고 웃었다.      


식탁이 거의 차려졌을 때 C가 사모 X와 함께 들어왔다. W부부와는 가까이 지내며 오가는 사이였다. 나와는 거의 10년 만이었고 N과 R부부와도 그 정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환대의 인사가 오가고 C와 X가 자리에 앉으니 ‘목자’와 ‘양들’의 만찬자리가 되었다. 3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기분이었다.   


“근데, 사모님 팔 때문에 요즘 목자님이 가사노동 좀 하시겠네요?”

나란히 앉은 C와 X를 보며 내가 물었다. 오른팔이 깁스라 왼손을 쓰고 있던 X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이고, 말을 말아. 앓느니 죽지. 앓느니 차라리 내가 죽지~.”

X는 눈을 흘기면서도 웃는데 C는 똥 씹은 표정이 되고 있었다.

“어디다 대고 명령질이야, 명령질이. 그러니 내가 안 하는 거 아냐.”

C는 화난 표정이었다. 나는 귀를 의심하면서도 더욱 쫑긋 세워 들었다.      

“안 그래? 이거 좀 해주세요, 부드럽게 부탁해도 할까 말까 한데, 이거 해! 저거 해! 얻다 대고 명령질이냐고. 거걸 내가 왜 들어!”  


위엄까지 더해진 C의 목소리가 식탁 위에 울려 퍼졌다. 우리 중 그 누구도 다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밥만 먹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깁스가 자꾸 내게 말을 걸더라니, 내 머리는 맑아지고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71세 남편이 40여 년 동반자 아내에게 하는 말을 보라. 어떤 실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건 가부장의 화신이었다.


   

나한테 그딴 화법으로 말하지 마세요!     


“백합교회 가봤어? 그리로 가야지?”

어찌어찌 식사를 마치고 차 한잔씩 놓고 거실에 둘러앉았을 때였다. C가 나를 향해 질문인지 지시인지, 그 익숙한 화법으로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 건성으로 답했다.

“네? 뭐라고요?”

C가 본심을 드러내 말했다.

“백합교회로 옮겨야지? 가야 하는데, 드보라가 문제야. 따라갈 거냐가 문제라고.”     


고요했던 내 가슴은 순식간에 활화산으로 변해버렸다. 마그마가 꿈틀대듯 이 정도 벌렁거리는 가슴은 결코 그냥 진정되지 않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계산하고 말 것도 없이 나는 말해야 했다.

“문제요? 제가 왜 문젠데요? 백합교회도 그 문제란 것도 알고 싶어지네요.”  

내 말투가 심상찮게 들렸으리라. C가 짐짓 부드럽게 말했고 나는 또 쏘아붙였다.

“백합교회에서 정 목사 설교 좋다고, 모시고 싶다더만. 가야지. 드보라도 따라가야지?”

“아뇨! 그럴만하면 정목사가 제게 의논했겠죠. 저는 아직 구체적인 소릴 들은 게 없어서요.”     


백합교회는 덕이 시간강사 목사로 주일예배 설교하는 서울의 작은 교회였다. 오전에 서울을 다녀오고 안산에선 주일 오후에 예배한 게 1년이 넘었을 것이다. 덕이 그 교회로 가면 C에게 무슨 떡고물이 생기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문제라는 그 말투야말로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곧 화산이 폭발할 듯 부글대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나는 깊은숨을 쉬어야 했다.     

 

“정 목사가 간다면 드보라도 따라가란 소리지.”

결국 화산이 폭발했다.

“아니죠! 그걸 왜 목자님이 저한테 가라마라 끼어들어요? 정목사는 합바진가요? 본인이 갈만하면 저와 의논을 하든 기도하자 하든 해서 결정하겠죠. 근데 제가 문제라면서요. 그 얘기나 좀 들어 보자고요.”

어안이 벙벙해 보였달까, C와 X는 당황하고 있었다. 둘러앉은 벗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버르장머리야? 내가 말하면 잘 새겨서 들으면 되지.”

C가 하는 말마다 내겐 불에 기름을 끼얹는 소리였다.    

 

“아뇨! 당신이야말로 내 말 좀 새겨들어요.”

그리곤 둘러앉은 친구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내쳐 말했다.

“어이, 친구들, 앉아서 잘 좀 듣고 판단해 주라. 내가 도대체 뭐가 문젠지 몰라서 그래. 자 말해 주시죠. 백합교회에서 어떤 조건으로 정 목사 오래요?제시해 보시죠. 안산집 전세 빼면 서울 가서 원룸도 못 구해요. 애 셋 데리고 아직도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올까요? 우리가 어찌 사는지 당신이 알아요?…”

나는 이미 미친년이었다. 나는 총을 겨누듯 그에게 집게손가락만 편 손을 들이댔다.     


“분명히 경고합니다! 나한테 그딴 화법으로 말하지 마세요! 얻다 대고 문제 타령이야?”  

C가 화난 얼굴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나는 나대로 화법이 있는 거지. 내가 드보라 맘에 드는 화법으로 꼭 말해야 하나? 왜 저런 말씀을 하나 생각해 보면 안 되고?”

내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소리쳤다.

“아뇨! 당신이 생각해요. 또 그딴 식으로 말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알아 들어요?”    

 

C가 곁에 있는 X의 손목을 확 잡아채곤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가자!”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없이 뒤도 안 보고 문을 나갔다. 아무도 두 사람을 잡지 않았다.   

   

미쳐버린 화숙이는 복도 많지. 살불살조, 2016년 9월 28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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