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 살 큰아들의 결혼식에 나와 덕이 ‘혼주’란 이름으로 참여했다. 이 봄처럼 젊은 민과 훈이 평생의 동반자가 되자고 약속하는 자리였다. 부모이자 하객의 한 사람으로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건 두 사람이 직접 써서 낭독한 ‘혼인서약서’였다. 그들이 함께 해온 길, 사랑, 그리고 소망과 다짐의 글은 ‘평생 좋은 친구로 사랑하자’로 요약될 수 있었다.
34년 전 숙덕의 결혼식이 오버랩되어 보였다. 그때 그 결혼에 ‘혼주’는 누구였을까. ‘하나님의 종’이 하는 대로 한 그 결혼과 민훈의 이 결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세계였다. 결혼은 법적인 주체가 하는 행위 아니던가. 그러니 이제 자식의 결혼식에 부모를 ‘혼주’라 부르지 말자. 스스로 설계하고 자기 주도적으로 하는 결혼식에서 혼주는 그들, 신랑신부였다.
부끄러움은 내 몫이다. 자기 삶의 주체가 못 된 사람이 남의 주권을 쉽게 침해하는 걸 알겠다. 내가 그랬다! 자식에게, 공동체에서, ‘사랑’이란 이름으로 폭력을 행하던 때가 있었다.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누려본 적 없으니 남도 못 누리게 했으리라. 어느 날 분노를 폭발하고서야 나는 나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나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였다. 내가 알게 모르게 상처 입힌 분들에게 사과하는 글로 쓴다.
민훈 부부의 혼인서약서
신랑: 하필 소개팅 첫날부터 지각을 했는데, 그녀가 지금 제 옆에 신부로 서 있습니다.
신부: 갤럭시를 쓸 것 같았지만 의외로 아이폰을 쓰고 있던 그는, 그 이후로도 많은 반전과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 끝에, 지금 제 옆에 신랑으로 서 있습니다.
함께: 저희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오늘, 소중한 분들을 모신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합니다.
신랑: 당신이 내게 쏟는 진실한 마음과 신뢰, 사소한 것 하나하나 챙겨주는 정성까지 늘 감사해하며 당연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매사에 헌신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당신의 무거운 짐을 제게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든든한 남편이 되겠습니다. 한국에서 혼자 여러 준비를 도맡아 하고, 미국에 있는 저와 시차를 맞추기 위해 밤을 새워가면서도, 화 한번 안 낸 당신의 배려심에 감사합니다. 지금 이 마음 변치 않고, 언젠가 당신이 늙었을 때 미소 지으며 오늘을 추억할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해 사랑하겠습니다.
신부: 당신은 제가 이제까지 못 하던 것들도 해볼 수 있는 용기, 안 하던 것들도 할 수 있는 변화를 주었습니다.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그대가 곁에 있음에 언제나 감사하는 아내가 되겠습니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당신은 소유에 대한 욕심보다 경험에 대한 욕심이 많은 멋진 사람이라 느꼈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할 때마다 설레하는 당신의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켜주겠습니다. 지금껏 그랬듯,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깊게 나눌 수 있는 최고의 말동무가 되겠습니다. 저는 사랑이 이긴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지치고 힘든 순간이 다가오더라도, 언제나 안길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 당신 곁에 있겠습니다.
신부: 우리의 아침이 서로를 웃게 할 즐거운 궁리들로 시작되기를
신랑: 함께 걷는 골목골목이 사랑의 기억들로 채워지기를
신부: 서로에게 더없이 좋은 친구로 살아갈 것을
함께: 함께 해주신 여러분 앞에서 진심으로 서약합니다.
당신을 아내로 맞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랑
당신을 남편으로 맞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위해
먼저 Y, Z 부부를 불러봅니다. 1996년 제가 폴란드에서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두 분은 연애 중인 20대 직장인이었어요. 연애가 ‘회개할 죄’인 선교단체 지부에서 말이죠. 고백할게요. 담임으로 온 저희 부부에게 두 분은 ‘해결해야 할’ 첫 과제였어요. 서울의 J 사모는 저를 처음 만난 날부터 말했어요. Y와 Z를 회개하도록 잘 ‘도우라’고요. 저와 면담했을 때 Y는 Z와 별 심각한 관계 아니라며 저를 안심시켰지요. 저도 그 말을 믿었고요.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두 분이 헤어질 마음이 없음은 물론 회개할 뜻도 없었어요. 저는 두 분이 저를 속였다며 불같이 화를 내고 말았죠.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두 분은 지체 없이 단체를 떠났죠. 얼마 후 결혼 소식이 들려왔고요. 초대받지 못했지만 제가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러 가고 싶어 한 맘 아실까요? 나중에 a를 통해 맘을 전했잖아요.
두 분의 결단과 용기에 저희가 박수를 보냈다면 믿으실까요? 낙인과 정죄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사랑하며 사시길 제 마음 다해 기도했어요.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뜨겁게 포옹할 수 있길 소망했어요. 고백할게요. 제가 당시 선택적 기억상실증이 있었어요. 두 분보다 10년 먼저 단체에서 폭력적인 ‘마녀사냥’을 경험한 제가 어떻게 두 분의 사랑을 그렇게 대했을까요. 나쁜 기억을 제가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 애썼기 때문이었어요. 그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Y님 Z님! 그때 두 분의 사랑을 축복하지 못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땐 폭력에 너무 길들어 있었어요. 사랑도 결혼도, 심지어 삶 전체를 권력가진 리더에게 의탁하고 복종하도록 배웠으니까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유태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걸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아무 거리낌 없이 말했잖아요. 무사유無思惟는 결국 편협한 광신자의 길이었어요.
두 분 덕분에 저희 눈이 조금씩 뜨였달까요. 후에 a가 비기독교인 b와 결혼할 때 저와 덕은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었어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에 알파벳 대문자를 다 써서 소문자로 다시 붙인다.) c가 인터넷으로 d와 사귀고 결혼하게 됐을 때도 저희가 기쁨으로 축하하며 잔치에 참여했어요. e와 f가 단체를 떠나 멀리서 결혼할 땐 저희 온 가족이 여행 가서 축하했어요. 단체를 넘어 우주적인 교회를 보기 시작했달까요.
g와 h에게도 사과하고 싶었어요. g는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유학을 준비하는 미혼 여성이었고 h는 법조인 미혼여성이었죠. 유능하고 멋있는 두 여성들을 더 자유롭게 날 수 있게 지지하기보다 저는 날개를 꺾으려 했어요. 단체의 ‘사역’에 좀 더 헌신하길 바라는 맘이었어요. 물론 그럴듯한 포장지로 포장해서 말했죠. “자기 꿈보다는 하나님의 양들을 위해 좀 더 시간을 쓸 수 있는 길”이라거나 “자기 장래를 하나님께 드리고 헌신할 수 있길” 이런 식으로요.
두 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g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학을 떠났고 h는 법조인으로 다른 곳으로 떠났어요. 하나님의 사명이란 이름으로 제 삶을 쥐락펴락한 ‘주의 종’이 하던 짓을 저도 하려 했던 거죠. 여성의 전공과 직장은 언제라도 희생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죠. 가정의 머리, 가장이자 생계부양자로 호명되는 남성은 그런 폭력을 당할 일이 드물었어요.
g님 h님, 제가 그런 '명자 씨'로 살았어요. 성차별이 너무 익숙해서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가부장제의 부역자로 살 팔자였지요. 많이 실망했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몇 년 만에 g가 귀국해서 저를 찾아온 것도, 저의 사과를 받아주신 것도 고마웠어요. h님, 힘들여 쌓은 커리어를 버려도 될 일로 취급한 것 죄송해요. 저를 상종 못할 인간 취급하지 않고 관용으로 대해 주신 것, 제 안목을 흔들어 주신 것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U, V 부부를 불러봅니다. 한국에 돌아온 이듬해 우리가 만났으니 어느새 우리는 26년 지기가 되었죠. 숙덕을 신뢰해서 U는 결혼할 사람을 소개받기 원했더랬지요. 하프타임의 숙덕은 그러나 이전에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있었어요. U에게 잘 맞는 짝을 인도하시길 기도는 했지만 직접 중매할 뜻이 우리에게 없었던 건 알고 있었죠?
“우리 자식이라면 어떻게 할까?”
어느 날 U가 V를 데려왔을 때, 우리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었어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늘 “문제 해결!”을 외친 부모였잖아요. 자기에게 닥친 문제는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하며 자란 우리 아이들이 짝을 데려왔다고 생각했어요. 부모의 일은 그들을 믿고 축복하는 것뿐이더군요. U와 V의 사랑과 결혼도 그런 마음으로 보았어요. 두 분의 뜻을 따라 덕이 주례하는 복도 누렸죠. 신부에게 ‘순종서약’ 따위 안 시키는 결혼식이었고요.
돌아보면 그래도 아쉽고 미안한 건 있어요. V가 혹시 U에게 나쁜 남자 아닐까 내가 눈에 불을 켜고 살핀 게 좀 미안해요. 결혼식이 토요일이었는데 주일예배 후에 신혼여행 떠나게 한 것도 미안했고요. 우리 큰 놈 결혼식도 토요일에 있었어요. 주일 예배요? 전혀 강요하지 않았어요. 목사가 주례하는 그런 예식도 아니었죠. 그런데 저와 덕의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어요. 젊은 사람들이 주도하는 잔치를 제대로 즐기는 복이었죠.
할 말은 아직 태산이지만 제가 좋아하는 책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의 한 문장으로 마무리할게요. 지난날 저의 불관용 때문에 상처받은 벗님들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합니다.
“자기 자신의 의견 말고는 모든 의견을 억압하려는 편협한 광신주의에 대항하여, 이 세상의 온갖 적대심을 해결할 수 있는 저 이념, 곧 관용의 이념이 내세워진 것이다.”(194쪽)
* 이 꼭지를 끝으로 브런치북《숙덕숙덕 사모가 미쳤대》연재를 종료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드디어 마감합니다~~~ 종이책 목차 상 제5장 두번째 꼭지인데 나머지 꼭지들은 전에 써 둔 것으로 묶고자 하거든요. 다음 브런치북은 30꼭지 이내로 끝내야겠어요.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