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억 공간을 만들자고 생업을 멈추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떠올랐어.
햇빛보다 더 밝고 정겨웠던 성호야
엄마는 너를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과 미안함을
견뎌내기가 너무도 어렵구나.
어린 동생과 누나들은 너의 고통에 비교할 수 없다며
억울함과 분노를 참아 견디고 있지만
억울하고 참혹하게 너를 잃은 그날부터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도 잃었고,
삶도 꿈도 희망도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졌어.
너 없는 자리에서 너 없는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롭고 허무한 것인지를
우리는 뼛속 깊이 새기고 있단다.
너 없는 방, 너 없는 집, 너 없는 성당, 너 없는 자리,
너 없는 도시, 너 없는 나라, 너 없는 지구별은
내게는 그냥 빈 무덤 같아....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 군 엄마 정혜숙 님의 편지 중
햇빛보다 더 밝고 정겨운 성호야!
엄마가 6년 전에 쓴 편지글 시작 부분을 옮겨 적어 보았어. 엄마는 너를 "햇빛보다 더 밝고 정겨웠던 성호야!"라고 부르셨구나. 너를 떠나보낸 후 견뎌내기 힘든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시며, 너 없이는 의미를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을 말씀하셨구나. 그래 성호야,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네가 없다는 이 현실을 그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겠니. "햇빛보다 더 밝고 정겨운 성호야"라고 나는 현재형으로 바꿔 부른다. 네 얼굴, 네 표정, 네 말과 삶이 여전히 밝고 정겨운 빛을 발하는, 살아있는 존재로 너를 부른다.
"너 없는 방, 너 없는 집, 너 없는 성당, 너 없는 자리, 너 없는 도시, 너 없는 이 나라, 너 없는 지구별은 내게는 그냥 빈 무덤 같아." 엄마의 편지에서 이 구절이 특히 내 마음을 울리는구나. 방에서도 집에서도 성당에서도, 이 지구별 어디에도 네가 없음을, 너의 부재를 절절히 표현하셨구나. 발 닿는 모든 곳이 엄마에겐 빈 무덤처럼 공허하게 느껴진다는구나. 성당을 나가시는 부모님에게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너. 참 예의 바르고 애정표현도 잘하는 순둥이에 화도 잘 안 내는 느긋한 성격이라 두 누나와 동생은 너를 나무늘보라 놀렸다지. 중3 때부터 키가 쑥쑥 자라고 성격도 어른스러워지면서 밤엔 버스정류장으로 누나들 마중을 나가고 엄마의 장바구니도 들어주었구나. 고등학교 1학년 말, 예비신학생을 위한 피정에서 진로를 위해 기도한 후 너는 꼭 사제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지.
사제를 꿈꾸는 소년 성호야! 너를 그리며 네 이름을 딴 임마누엘 성당을 다녀왔단다.
임마누엘 성당
이 성당은 사제성소의 꿈을 키우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고 박성호(임마누엘) 학생을 기억하며, 세월호 참사 진실규명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참사의 아픔을 극복하려는 시민들의 노력과 재능 기부로 안산시 정부합동분향소에 세워졌고, 4주기까지 분향소를 지켜오며 시민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건물이다.
분향소 철거와 함께 2018년 5월 1일 수원가톨릭대학교로 이전하면서 "임마누엘 성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치하게 되었으며, 고 박성호(임마누엘) 예비 신학생을 포함한 세월호 희생자 304위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라는 다짐을 새로이 하는 기도의 집으로 수원가톨릭대학교의 역사와 함께 길이 머물 것이다.
너는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처럼 사회정의와 약자들 편에 서는 사제가 되고 싶었지.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 대해 목소리를 낸 성호구나. "먹는 것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 정말 나쁜 일인데, 엄마는 왜 참여하지 않아요?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운데, 어른들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 생활을 할 수 있나요? 왜 연대하지 않고 돕지 않죠?" 2009년 용산참사 때는 "인간이 어쩌면 저렇게 악할 수가 있어요?"라며 마음 아파했지. 너는 틀림없이 지금도 그런 목소리를 내며 행동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을 텐데, 성호야, 너무너무 그립구나. 네 꿈을 기억하며 네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 있어서 고맙구나. 네가 1년에 한 번씩 성소주일에 다녀오던 곳이자 그토록 진학하고 싶었던 신학교, 수원가톨릭대. 그 교정에 네 이름을 딴 임마누엘 성당을 다녀왔단다.
세상에서 아마 가장 작은 성당일 거야. 작지만 지붕 있고 문 있고 창이 있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경당이었어. 그 작은 집의 지붕 끝 네 귀퉁이에는 십자가를 매단 풍경이 있더구나. 바람이 불면 "잊지 않겠다" 노래하는 풍경이었어. 그 옆에는 팽목항에 서 있던 세월호 십자가도 있구나. 공간의 중요성, 기억 공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단다. 경당과 나란히 선 세월호 십자가 앞엔 노란 리본 조형물과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 있구나.
세월호 십자가
2015년 8월 3일 팽목항에 세월호 참사와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십자가상이 세워지다. 비극의 팽목항에 세워진 이 십자가에 강복하시어,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들마다 위로의 기쁨을 얻게 하시고, 비극을 잊지 않겠다는 기억의 정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싸우겠다는 정의의 기력이 꺾이지 않도록 해 주소서.
2017년 4월 27일 팽목항에 세워졌던 '세월호 십자가'가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정으로 옮겨지다.
잊지 않겠습니다.
거기까지 가서 성당의 겉모양만 보고 돌아올 순 없더구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단다. 제법 공간이 넓었어. 열 명 정도는 둘러앉아 기도도 하고 토론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겠더라. 벽엔 세월호를 기억하는 액자들이 걸려 있었어. 나는 아주 오랜만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감았지. 고요했어. 너를 생각하고 엄마와 누나들과 동생을 생각하며 기도했어. 너를 보낸 후 엄마와 누나들이 어떤 투사로 사셨는지 나는 기억한단다. 엄마가 하신 말씀도 생각났어. 네가 살아 있을 때, 성호가 질문하며 사회 문제를 말할 때, 그때 연대하고 행동했더라면 이런 참사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 후회한다던.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렇게 행동하신다던 말씀이 생각났어. 보나 누나가 한 말도 고요한 내 귀에 울려오더구나. "제발 기도만 하지 말고 행동해 달라." 그랬지, 세월호 참사는 믿음에 대해 기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지. 세상을 바꾸는 기도는 결국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걸 세월호가 가르쳐 주었지.
임마누엘 성호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이 말이 계속 내게 말을 거는구나.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 맞아?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그랬듯, 세월호 참사도 사람들에게 임마누엘을 말하기 어렵게 만들었지. 임마누엘 성당에 앉아서, 교정을 거닐며, 너와 함께 묻고 또 물었단다. 임마누엘이냐고. 한 가지, 이 기억 공간을 만들자고 생업을 멈추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떠올랐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며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힘을 모았던 목수와 자원봉사자들, 목재와 자재와 필요한 것들을 댄 사람들이 있었지. 안산에서 팽목항에서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한 사람들이 있었구나. 임마누엘이구나. 그래, 안산 생명안전공원이 지어지기까지, 세월호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내가 갈 길이 보였어. 그래, 행동으로 기도하기. 임마누엘 성호야, 사랑해!
(세월호와 함께 별이 된 단원고 2학년 5반 박성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