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안에 가득 차 있는 두려움, 맞아 본 자의 두려움, 그걸 깨부숴야 해
“독자로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싸우는 장면이다. 나는 싸움이 늘 어렵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싸움의 기술을 다음 책에 써 주면 좋겠다.”
“화숙이 진행하는 영화·책 토론을 좋아한다. 내가 못 본 걸 볼 수 있게 하는 시선이 좋다. 영화·책 이야기와 함께 싸움의 기술을 책으로 써 달라.”
내 책 《숙덕숙덕 사모의 그림자 탈출기》의 북콘서트에서 다양한 독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참석자들 모두에게 마이크를 돌리도록 40분을 할애한 기획 덕분이었다. 내 책이 독자들에게 가 닿아 울리는 공명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내 원동력은 분노였고 내 목표는 목소리였다.”라고 말했으면 된 거다. 얼굴을 마주 보며 주고받는 목소리는 과연 힘이 있었다. 그중에 특히 “싸움” 또는 “싸움의 기술”이란 말이 내 귀에 깊이 꽂혀 들어왔다.
그래 맞아, 싸움은 나도 꽂혀있는 주제였다. 그렇게 다음 책 가제 《싸움의 기술》이 정해졌다.
싸우는 여자에게 꽂힌 나
페미니즘과 갱년기 덕분에 나는 싸움 잘하는 여자에게 꽂혀 버렸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시작으로 싸움 관련 작품을 찾아보는 마니아가 됐다. 50년을 안 싸우는 게 미덕인 줄 알고 살던 여자가 말이다. 넷플릭스 로맨틱 코미디 <연애대전>도 팍 꽂혀서 몇 편을 내리 보았다. 남자한테 지독히 지기 싫어하는 여주인공 미란(김옥분)은 태권도부터 시작해서, 유도, 합기도, 쿵후, 권투에 격투기까지 배운 변호사다. 왜 그렇게 다 배웠냐 묻는 남자와 주고받는 말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취미에 이유가 있나요. 그냥 좋아서 했죠."
"뭐가 좋아요? 싸우는 거?"
"아뇨. 싸웠을 때 이기는 거요."
바로 그거다. 그냥 싸우는 게 좋을 리가 있나. 나는 어쩌면 싸우기 싫어한 게 아니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싸워 이기는 맛을 본 미란은 온갖 격투기를 배웠다. 자기 방어 기술을 배우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시대를 반영하는 캐릭터다. 요즘 여자들만 싸움의 기술을 배울까? <에놀라 2>는 100년 전 빅토리아 시대에 활약한 "싸우는 여자들" 이야기다. 영국에서 써프러제트(여성 참정권자)들은 호신무술인 주짓수를 배우고 참정권 싸움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체구가 작은 여성이 경찰과 몸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에놀라 홈즈 2>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세 여자가 주짓수로 남자 경찰들을 때려눕히고 이기는 장면이었다. 에놀라를 탈옥시켜 이디스가 마차를 몰아 셋이 도망할 때 마차가 뒤집히고 경찰에 잡힐 일촉즉발 위기였다. 주짓수 고단수 이디스가 경찰관을 때려눕히자 세 여자와 세 경찰의 본격 몸싸움이 벌어진다. 3분간 롱샷으로 이어지는 이 싸움 장면에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 중 합창곡 '할렐루야'가 크게 울려 퍼진다. 치마 입은 세 여자가 제복 입은 남자 경찰들을 때려눕히고 이기니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게 싸움의 기술이란
2019년에 나온 백윤식 주연의 한국 영화 <싸움의 기술>을 다시 보았다. 싸우는 영화, 특히 한국 영화는 주먹 세계 남자들 이야기뿐이라며 툴툴대던 내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싸움의 기술을 탐닉했다. 생각해 보라. 싸움은 여자들 영역이 아니었다. 주먹싸움도 군비경쟁도 전쟁도 다 남자들 세계였다. 나는 부모의 부부싸움이 지겨워서 안 싸우는 여자로 긴 세월 살았다. 그러나 안 싸우는 게 곧 평화도 승리도 아니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니 안에 가득 차 있는 두려움, 맞아 본 자의 두려움, 그걸 깨부숴야 돼.”
판수가 고등학생 병태에게 가르쳐 준 싸움의 기술이었다. 고수답다. 싸움의 상대는 밖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먼저 깨부숴야 하는 건 내 안의 두려움이다. 맞다. 나는 맞고 자란 년의 두려움을 잘 알았다. 물리적인 폭력만 아니라 혐오와 가스라이팅과 성차별에 맞아 본 년. 그래서 두려움을 알았다. 성차별적인 공기에 있으면 가슴이 먼저 답답해졌다. 욕먹을까 두려워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걸 ‘현명함’으로 포장하고 살았다. 맞아 본 년은 또 맞을게, 오해받을 게 두려웠으니까. 그걸 인식하고 분기탱천하기까지 50여 년 세월이 걸렸다.
가부장제는 언제나 두려움을 팔아서 유지되는 시스템이다. 약자에게 고분고분해야 사랑스럽다고 개구라를 쳐왔다. 온갖 거룩한 말로 포장해서 순종하라 가르치고 여자를 마녀와 성녀로 편가르고 길들여지지 않으면 혐오하고 배재했다. 그런 거짓말에 속아서 나는 죽어라 충성하며 성녀로 인정받아보려 했지만 말짱 꽝이었다. 암수술과 갱년기 덕에 내 안에 가득한 두려움의 실체를 째려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과 예수의 자유와 해방 정신이 만나 내 안의 두려움을 깨부술 수 있었다. 나는 싸우는 여자로 거듭나 버렸고 싸움의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니 안에 가득 차 있는 두려움, 맞아 본 자의 두려움, 그걸 깨부숴야 돼.”
어때? 다음 책 재미있을 거 같지? 어서 《싸움의 기술》을 쓰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