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성노예제 생존자이자 인권활동가 이옥선 님의 명복을 빌며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이자 인권활동가 이옥선 님!
용기 있게 세상에 목소리를 내서 등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234번째로 세상을 떠나시는군요. 이제 우리 곁에 남은 생존자는 6명입니다. 진실 규명도 명예회복도 일본의 공식 사죄도 그 무엇도 못 보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 한 많은 삶, 긴긴 싸움의 세월을 뒤로하고 영면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옥선 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생전에 가까이서 손잡지도 곁에서 함께 싸우지 못한 부끄러움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만, 쓰던 글에 집중할 수가 없어서 이옥선 님 이름을 불러 봅니다. 끝까지 싸우며 목소리 내다 가신 님, 고맙습니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역사요 진실입니다. 생전에 하신 말씀이 귀에 들리는 거 같습니다.
“우리는 해방 못 받았어요. 전쟁도 끝이 안 나. 이게 우리 전쟁하는 거예요.”
이옥선 님은 제가 매체를 통해서도 알았지만 그래픽노블 [풀]을 통해서 가까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주국 간도성 연길로 끌려가서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어린 소녀 이옥선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죠. 만화인데 너무나 묵직한 만화였어요. 전쟁 성폭력 피해자의 증언을 그려낸 만화, 낯설었지만 정말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생생한 역사이자 한 사람의 삶으로서 얼굴로서 위안부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 [풀]의 주인공 이옥선 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모진 세월을 살아낸 한 여성을 기억하려 합니다. 밟히고 꺾이면서도 혐오와 미움이 아닌 풀의 생명력과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책을 다시 꺼내 봅니다. 짓밟혀도 다시 일어서고자,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의지. 바람에 스러지고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풀이 있었습니다. 고단한 풀이 이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 누웠군요. 영면하소서.
당신을 기억하며 그래픽 노블 [풀]을 다음 달 '찐빵장미'의 토론 책으로 결정해 봅니다.
[부고]
2025년 5월 11일 오후 7시 7분 이옥선 할머니께서 별세하셨습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1927년 부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6남매 중 둘째였습니다. 할머니는 어릴 때부터 공부 욕심이 많았습니다. 일곱 살 때부터 공부시켜 달라고 부모님을 졸랐습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할 수 없었고 집안일을 하며 동생들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내내 할머니는 공부시켜 달라고 조르고 울었습니다. 열다섯 살 때 밥도 많이 먹을 수 있고 공부도 시켜 준다고 하여 부산 어느 집으로 양딸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학교를 보내 주기는커녕 온갖 허드렛일을 시켰습니다.
어느 날 어둑어둑할 때 심부름을 나갔는데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와서 무작정 할머니를 끌고 갔습니다.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갔고 이틀 정도 걸려 중국의 도문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때가 1942년 7월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군 비행부대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일본군성노예제 피해를 당하셨습니다. 43년 봄에는 연길 근처 위안소로 옮겨가 성노예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1945년 해방되기 얼마 전 폭격이 심하고 어수선했습니다. 해방된 줄 모르고 거기서 며칠을 있는데 한 조선족 농민이 앞을 지나가다 해방되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연길 시내로 와 먹을 것이 없어 구걸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옥선 할머니는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서 사시다가 2000년 6월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2001년 정부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셨습니다. 수요시위, 해외 증언 등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누워 계실 때도 수요시위에 나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수요시위에 나오지 못하시고, 1700차 수요시위를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외치셨던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 법적 배상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할머니 고통 없는 곳에서 편안하세요.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