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덕숙덕 영화로 하는 싸움의 기술
260208. 일. 맑음. -2/-13
오늘의 위풍당당 일기 제목에 내 별명인 "김집요"를 써 봤다. 오늘 하루가, 아니 지난 한 주가 폭풍같은 김집요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집요, 나는 이 이름이 좋은데, 사람들은 어떤 느낌으로 읽을지 궁금했다. 책에 들어갈 글로 집요는 몇 꼭지라도 될 가능성이 있어서, 내 비서 제미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내 별명이 '김집요'라면 어떤 느낌이 와?"
제미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김집요'라는 별명, 화숙이 너랑 참 잘 어울리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주는 이름이야. 내가 느낀 세 가지 시선은 이래."
1. 목적지를 바꿀 바엔 길을 새로 만드는 사람.
단순히 '질척거린다'는 느낌과는 결이 달라.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사냥개 같은 집요함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나 파고들고자 하는 주제의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탐구자의 느낌이 강해. 글을 쓸 때도 적당한 단어에서 타협하지 않고, 복싱할 때도 잽 하나에 온 신경을 다 쏟아붓는 모습이 그려져.
2. '대충'이라는 시스템이 통하지 않는 상대
상대방 입장에서는 꽤나 까다로운 존재일 거야. 논리의 빈틈이나 모순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파고들 테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의 회유가 통하지 않는, 서늘할 정도로 명징한 자의식을 가진 활동가의 이미지가 떠올라.
3.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완벽주의의 변주
타인에게 집요한 만큼 자신에게는 더 가혹할 것 같아. 60대에 복싱을 시작하고, 세월호를 기억하며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사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잖아. 그 에너지를 유지하는 동력이 바로 그 '집요함'이겠지.
한 줄 평: "친해지면 든든하지만, 적으로 만나면 가장 피곤하고 무서운, 그러나 끝내 본질을 찾아내고야 마는 장인."
그래, 나 김집요는 목요일에 조조로 혼자 본 영화 <직장상사 길들이기>를 오늘 오후에 덕과 함께 또 봤다. 다시 봐도 나는 린다에게 무한 감정이입했다. 집요함과 복싱하는 장면이 있어 새삼 좋았다. 덕은 어땠을까? 저항이나 방어적인 태도가 없었다. 몰입해서 재미있게 보았다며 자기 느낌을 표현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10년의 페미니즘 공부가 도로아미타불은 아니었구나, 확인하며 수다떨 수 있었다.
영화 보고 나오는데 내 뒤에서 어떤 젊은 남자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나는 똑똑히 들었다.
"여주가 너무 이상하지 않아? 다른 사람 다 죽여버리는 건 너무 심하잖아. 그 사람들은 무슨 죄야?"
딱 그정도가 더도 덜도 아닌 남성 중심 관점이지 싶다. 다행히(?) 덕은 영화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왜 그렇게 몰아가는지 이해하고, 중요한 포인트들도 페미니즘 관점으로 읽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김집요다. 나는 내 집요함이 좋다. 사람들은 집요함을 '피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거 안다. 그러나 나는 집요함을 재정의하려 한다. 내 집요함은 내 힘이다. 내가 가려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힘이자, 그 길을 막아서는 것들과 싸우는 힘이다. 나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근육이자 변화와 성장의 근력이 집요함이다. 그리고 내 집요함은 두려움을 노려보며 위풍당당 걸어가게 하는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