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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벌 김화숙 Jan 13. 2021

뜨개질, 모자, 유행, 그리고 암 수술

모자를 뜨개질하며, "그의 믿음은 그가 쓰는 모자의 유행처럼 변한다."


쓰다 남은 털실이 집에 좀 있길래 내 멋대로 모자 하나 짰다. 자유의 힘이 느껴지는 따뜻한 모자다.



오랜만에 뜨게질하는 즐거움에다 패션까지 완성했다. 그저께 저녁 동그라미 판을 짜고 다음 날 잠깐 마저 완성했다. 재 보진 않았지만 두세 시간 걸렸지 싶다. 기대 이상 만족이다. 여중 여고 시절 나는 가정 가사 과목'도' 즐기는 학생이었다. 뜨게질, 바느질, 자수에, 재봉에, 요리..... 우리 엄마가 워낙 뜨개질 바느질에 출중한지라 눈으로 보고 배우며 컸더랬다. 우리 애들 청소년 시절 엄마표 목도리 짠 이후 아주 오랜만에 한 뜨개질이었다.




어떻게 붉은 색과 푸른 색 조합으로 모자가 됐을까. 유행이냐고? 내 멋대로 창작의 즐거움이었다. 집에 자투리 푸른 보라색 털실이 보였다. 애들이 쓰던 대바늘도 몇 개 보이는데 코바늘이 없었다. 다이소에 갔다. 1,000원짜리 중국산 붉은 실 두 타래랑 국산 코바늘 세트 1,000원 주고 샀다. 세상에 1,000원이 이렇게 가치 있는 돈일 줄이야. 패턴이니 유행이니, 그건 모르겠고. 내 기분과 감을 따라 베레모를 짜기로 했다. 붉은 실이 끝나길래, 있는 실로 이어서 짰다. 뒷모습 심심하니까 보라색 방울도 만들어 달았다. 완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달엔 바느질로 모자 하나 살려냈더랬다. 작년 여성 단체 바자회에서 10,000원 주고 산 나름 패션 모잔데 베이지색이 좀 심심했다. 그냥 두긴 아까웠다. 이마를 튀는 색 띠로 둘러 보면? 나비 리본을 만들어 달아 봐? 단추를 달면 어떻지?...... 원래 비슷한 색 리본이 붙어 있던 걸 멋이 없어 떼버렸지. 이젠 밋밋해서 또 싫으니, 내 맘대로다. 단추 통을 쏟아 달 만한 걸 골라 봤다. 알록달록 천이 씌워진 단추들이 보였다. 모양도 색깔도 크기도 같지 않은 게 5개 나왔다. 바로 그거였다!







패션의 완성은 모자라 했던가?

나는 언제부터 모자를 즐기게 됐을까?

암 수술과 닿아 있는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술 후 자연치유 요양할 때 자발적으로 머리를 밀어버린 후부터겠다. 나는 항암제도 방사선도 쓰지 않았기에 머리 빠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요양하며 머리카락 없는 암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 암 친구와 함께 머리를 싹 밀어버린 날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충동이 이끄는 대로 저지른 일이었다. 만 53세 되는 생일날, 무슨 유행인지 패션인지 알 수 없었다. 이후 내 머리카락은 희끗희끗 반백으로 자라나왔다. 직장에 사표도 냈겠다, 자연치유에 염색은 맞지 않았다. 그건 뭐랄까, 자유와 전복의 새 길, 가 본 적 없는 길이었다.



문제는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내 반백 머리에 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관심이 많은지, 예전에 미처 몰랐다.


염색 좀 해라.

아직 염색 안 하기엔 너무 젊지 않냐?

마른 몸에 흰머리까지, 너무 없어 보인다. 남의 눈도 좀 생각하며 살아라.....



그런 어느 날 모자를 샀을 것이다. 돈 '좀' 주고 산 첫 모자는 두 개였다. 하나는 얇은 마 두건, 하나는 종이 끈으로 짠 중절모. 3주 단식에서 돌아온 2015년 봄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맨날 운동용 모자만 쓰고 외출할 수는 없었다. 삐죽삐죽 반백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자라 나왔다. 얇은 두건으로 덮어주니 패션 완성이었다. 그리고 가벼운 중절모는 외출 때 썼다. 그렇게 나는 암 수술 후 6년 반, 지금까지 반백 머리에 모자 쓰는 중년 패션으로 살고 있다.




자연스럽게 집에 모자가 늘어났다.


계절 따라 분위기와 장소 상황 따라. 선크림도 안 바르고 햇볕 아래 걷기 좋아하니, 모자는 운동 시 필수품이었다. 여름엔 차양은 넓게 팔은 민소매로. 비타민D를 만들어야 하니까. 맨날 같은 모자만 쓰면 싫증나니까. 그런데 모자란 게 그렇더라. 참 싫증이 잘 나는 패션 아이템이었다. 작년엔 분명 즐겨 썼는데 올핸 별로다. 환장한다. 돈 아까우니 중고 가게에서 사게 되더라. 역시 싫증나는 쓰레기였다. 싹 정리해서 내다 버리는 때가 오곤 했다.



어느 날, 돈 좀 쓰자, 처음으로 서울 모자 전문점에 갔다. 3년 전 생일날이었다. 그 모자는 아직 버림받지 않고 있다. 바로 써도 좋지만 옆으로 또는 앞뒤 돌려쓰면 훨씬 더 예쁜 모자였다. 내겐 인생 메타포 같아 애착이 가는 모자다.







숙덕은 같이 반백 머리에 모자 쓰는 중년 커플로 살고 있다. 결혼 30주년이 작년이었다. 흰머리 세계에선 덕이 나보다 '대선배'다. 자연 반백으로 살며 그 역시 숱한 조언의 비바람을 견뎌야 했다. 애들 어릴 때가 심했다.


"너희 할아버지셔?"


초등학생 막내와 마트에 갔다가 아이 반 친구한테 들은 인사였다. 세 아이들도 수시로 아빠 머리카락에 시비를 걸었던 때가 있었다. 왜 아니겠어. 엄마 아빠가 나이 들어 보이는 걸 좋아할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아빠~~ 염색 좀 하면 안 돼?"

"아빠~~~ 염색이건 블리치든 뭐 좀 바꿔 보란 말이야~~"


세월이 흘러 이젠 자식들 그 누구도 아빠 보고 염색하라는 사람 없다. 엄마 패션에 감놔라 배놔라 하기 좋아하는 큰놈조차 언제부턴가 염색 타령은 하지 않는다.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이젠 흰머리가지고 뭐라 하지는 않는 거 같다. 대신 강경화 장관 같다, 멋있다는 말을 덕담으로 훨씬 많이 듣고 있다. 시대도 변하고 나도 달라지고 세상도 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내가 모자를 쓴들 안 쓴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각자 사는 거도 바쁜데.....




그럼 나는 암 수술 이후 맨날 모자를 쓰고 다닐까?


천만의 말씀이다. 수술 후 처음 한 두해는 모자 없이 외출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내가 자유로워질수록, 내 몸이 강해지고 활기찰수록, 모자는 선택으로 밀려났다. 운동할 때 햇볕을 가리는 용도, 추울 때 따뜻하게 머리를 보호하는 용도, 그것 말곤 자유를 방해받지 않는 만큼만. 머리통도 바람 쐴 권리가 있으니까. 머리숱이 아직 많고 땀이 많은 나는 짧은 커트 머리가 최선이다. 씻고 말리기 쉽고, 관리하기 편하니까. 좀 자주 손질해 줘야 하는 번거로움은 없지 않다. 그러나 걸을 때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결의 맛을 어디다 비하랴.



그의 믿음은 그가 쓰는 모자의 유행처럼 변한다.

                                                                               셰익스피어



이 시점에서 셰익스피어가 떠오르는 건 뭐람.

인생 메타포 운운하는 이쁜 모자도, 뜨게질한 모자도, 결국 싫증날 유행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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