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할아버지 산소 비석에 새겨진 깨알같은 성차별
260305. 금. 흐리고여우비. 4/-1
"1919. 항일독립운동으로 창수영해간 연락망 총책으로 3.18만세 운동 당시 독립의식고취. 창수 주재소 탈취. 시위 중 회헌에 체포돼 3.19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 선고. 대구형무소에서 무수한 고문으로 불치병까지 얻게 되어 향년 59세로 타계하셨다. 1990. 건국훈장애족장 추서."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소에 있는 우리 할아버지 묘비 뒷면에 새겨진 문구다. 그래, 할아버지는 독립유공자시다. 들불처럼 번진 독립만세 주동자로 옥고를 치르고 고문 휴유증을 앓다 돌아가셨다. 가난한 식민지 청년으로서 죽어라고 일해도 가난한 농부가 독립운동까지 했으니 얼마나 살기가 팍팍했겠는가.
그런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 부모님은 가난하게 사셨고, 나 역시 독립유공자 손자녀로- 독립운동하신 분들의 후손이 대부분 그렇듯- 서민으로 살고 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의 기개 하나는 물려받아서, 불의에 눈감을 줄 모르는 무대뽀 중년으로 살며, 21세기형의 독립운동인 페미니스트 활동가고 살고 있다.
몇 년 만에 할아버지 묘소를 방문한 건 할아버지의 아들인 우리 아빠 기일이라서였다. 재작년 엄마 돌아가신 후 우리 세 자매와 남동생은 기일을 기념하는 방법을 대강 정했더랬다. 엄마 기일엔 아버지 엄마가 함께 모셔진 영천호국원으로, 아빠 기일엔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모셔진 대전 현충원을 다녀오기로 말이다. 조부모 기일을 따로 기억하기보단 부모 기일만이라도 기억하되, 조부모까지 기억하기로 한 셈이다.
묘소까지 갔으니, 다 아는 내용이지만 묘비에 새겨진 글귀들을 낱낱이 또 읽게 됐다. 할아버지 행적이야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 인적사항을 정리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가족들 기록은 우리 아빠가 정리했을 테다. 할아버지의 자식은 아빠와 세 고모,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다. 손자녀는 그 네분이 낳은 자식들과 배우자다. 아쉽게도 묘비에는 깨알같은 성차별이 기록돼 있었다.
이를테면 아빠의 아들딸들과 배우자는 할아버지의 손자들로 기록돼 있는데 고모네 자식들은 이름이 빠져 있었다. 외손이니까. 내 오빠와 남동생의 자식들은 할아버지의 증손으로 기록돼 있으나 나와 여동생과 언니네 자식들은 누락돼 있었다. 외증손이니까. 친정 오빠의 아들이 낳은 아들은 할아버지의 고손으로 기록돼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증손인 우리 세 아이들 이름은 없었다. 왜냐면 외증손이니까.
새길 공간이 부족해서? 글자 크기 줄여서라도 쓸 수 있었다. 허나, "외손자 귀애하느니 절굿공이를 귀애하지." 이런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속담이 왜 있겠는가. 딸을 출가외인이라거나, 딸은 살림밑천이라거나, 사위는 백년 손님이라거나, 다 같은 소리였다. 외손자는 남의집 '씨앗'이요 '족보'였으리라.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짝꿍과 여동생 남편, 즉 우리 아빠의 두 사위 이름이 한 자씩 오타나 있었다. 정확히 확인하시지 으이그....
언니와 여동생과 나 세 자매가 묘비 앞에서 박장대소 웃어재꼈다. 국립묘지가 떠나가라 깔깔깔 웃고 비웃어 주었다. 독입유공자 할아버지가 피흘려 지키려 한 이 나라가 이렇게 성차별적이었단 말이다. 아들딸 차별 친손외손 차별 성차별의 흑역사를 돌판에 새겨놨으니, 후손들은 부끄러워하며 보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