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혹은 반항의 역사, 아내》(매릴린 옐롬, 시공사, 2003)
260310. 화. 맑음. 10/-5
10년도 더 전에 읽은 매릴린 옐롬의 책 《순종 혹은 반항의 역사, 아내》을 다시 꺼내 본다.
새 책 작업을 하다 보니 '아내'라는 화두로 내가 내적 외적으로 엄청 싸운 이야기를 피할 수 없었다. 글을 수정하는데, 너무나 손댈 데가 많이 보이고, 어떻게 마무리할지 괴롭다. 여전히 논쟁적이고 계속 변해가는 개념이 아닐 수 없다. 최소한 내게 그렇고, 이 책이 그런 유의미한 질문을 하고 있다.
"아내는 멸종 위기인가?"이게 책 서문의 제목이다. 제1장 제목은 더 죽여준다. "재산 목록 1호는 아내"다. 물론 고대 세계의 아내 이야기다. 성서와 그리스 로마 시대를 중심으로 쓰였지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오늘날엔 해당되지 않는 말일까? 아직도 여자를 남자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치들이 없을까?
재미있는 질문 아닌가? 아내란 도대체 뭘까?
이런 질문을 안고 책을 읽고 쓰노라니, 없는 실력에 가랑이가 찢어지고 있다. 과연 얼마나 읽힐 것이며, 대중에게 가 닿을 이야기이긴 할까? 아내가 어때서? 아내 되고 싶다 어쩔? 힘든데 무슨 배부른 고민이냐고....
한 남자와 남편 아내 관계로 36년째 살다 보니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순종'을 요구받고 침묵에 길들여져 살다가 어느날 분기탱천, 그 이름에 질문하게 됐다. 반항하고 보니 아내란 이름은 불평등이었다. 그때부터 3인칭으로 칭할 때 '남편' 또는 '아내'로 부르지 않게 됐다. 가장 친밀하다는 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더 위계적이고 차별적이 되게 한다면 바꿔 보는 게 맞다는 결론이었다.
갈라서지 않되, 대신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다시 살게 됐다. 2인칭으로 부를 때도 3인칭으로 부를 때도 "덕이'와 "숙이"가 됐다. 굳이 관계를 지칭할 땐 남편 아내 대신 "짝꿍"이라 하게 됐다. 사람이 이름으로 불리고 부르며 살고 싶지 않은가? 이름을 되찾은 건 작은 새출발이었다. 계속 어떻게 더 해방되고 자유로운, 그러나 친밀한 새 관계로 살 것인가? 그 질문으로 읽고 쓰고 토론하며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아내는 멸종 위기인가?
가부장제에 최적화된 아내 상을 아직도 답습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겠지. 멸종 위기의 것을 부여잡고 아둥바둥 살자고, 포장하고 미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사람들에겐, 그 멸종위기가 반가울 수도 있다. 도태되고 사라져야 참신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새로운 관계가 오면 좋겠다.
짧은 인생, 이딴 거 고민하며 책상 앞에 붙어있는 나는 극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순종 혹은 반항의 역사, 아내》에서 발췌 하나만 맛보자.
불행히도 아내란 남편에게 봉사하고 복종하기 위해 존재하며 남편은 아내를 때리고 들볶아도 좋다는 낡은 믿음이 아직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에 버젓이 존재하는 진부한 믿음의 찌꺼기들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조차 너무도 많은 아내들이 매 맞는 아내들의 집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조차 운이 억세게 좋아 학대받는 상황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던 경우에 한정된 일이지만 말이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의 주류 사회에 속하는 남자들 중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지지하는, 아내는 남편을 떠받들어야 한다는 믿음에 찬성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남자가 아내를 때릴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하지만 낡은 생각을 뿌리 뽑기는 어렵다. 더욱이 몇몇 남성들뿐 아니라 여성들까지도 속으로는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아내란 여전히 ‘귀여운 여자’이거나 ‘약한 그릇’, 즉 구약성서, 중세의 교리, 종교개혁 시대에 맹위를 떨친 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편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이브의 딸에 불과하다.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도 아내는 남편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은 서양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당연한 일로 여겨져 왔고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 규범이 되고 있다. (p.16-17)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1552년에 만들어진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그 기원은 중세에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로 각각 기록된 기도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에 수록된 결혼 의례에 따라 결혼식을 치른다. 결혼 서약은 여전히 너무나도 아름답게 들린다. "나는 오늘부터 당신을 나의 아내(혹은 나의 남편)로 맞아들여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그날까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맹세합니다." 원래 아내는 "복종할 것"도 함께 맹세했지만 얼마 전부터 이 대목은 삭제되었다. (P.19)
유럽에서는 많은 국가들(예를 들어 덴마크, 스웨덴, 스위스, 벨기에, 프랑스)이 성별에 관계없이 결혼을 인정하고 있고 네델란드에서는 등록된 동성 부부를 아이를 입양할 수 있고 복지와 조세 혜택까지 받을 수 있는 어엿한 부부로 인정해 주었다. 게이나 레즈비언이라면 '아내'라는 용어가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아니면, '아내'는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특질로 간주된 것들 즉 부드러움, 공경, 풍부한 감성 등을 지닌 사허ㅚ적 심리적 존재로서 살아남게 될 것인가?(p. 20-21)
그러나 여성에게 결혼은 결코 무조건적인 축복은 아니었다. 결혼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남편의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남편의 권위와 변덕들 그리고 그의 주먹질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했다. 도한 결혼은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서 아내들이 겪을 끊임없는 정신적 긴장의 잠재적 위험을 의미했다. 17세기 초반에 정신 질환으로 찾아온 1,000여 명의 여자 환자를 상담했던 로버트 네이퍼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특히 딸과 아내로서 겪었던 억압으로 인해 고통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p.2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