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우리 가족 3대에 미친 영향
260402. 목. 맑음. 17/0
저녁에 '안산시민 긴급 평화 촛불' 집회에 참여했다. 중앙동 월드코아 앞 광장에 100명? 정도 시민이 모여 "미국의 침략전쟁 규탄! 파병반대!" 구호를 외쳤다. 안산 시민 활동가들이 긴급하게 연대하는 자리였다. 전쟁반대라는 무거운 주제라서일까, 발언자는 모두 세 사람이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해 시드니의 안작 메모리얼 동상 이야기로 연설을 마쳤다. 좀 아쉬운 감 없지 않으나 이렇게라도 발언했다는 데 의미를 두기로 한다. 월요일 집회 기획 단계에서 사회자인 현주 샘한테 전화를 받고 발언을 수락했더랬다. 하지만 광주 여행 다녀오느라 차분히 연설 준비에 쓸 시간은 없었다. 오늘 오전에사 간략하게 A4 한쪽으로 준비해 보내주고 오후엔 딸과 모처럼 잡은 쇼핑을 나갔다. 글쓰기보다 쇼핑이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몇 시간 돌아다녀도 맘에 드는 추리닝은 못 샀으니 말이다.
전쟁과 평화는 어려운 주제다. 무겁고 거창하게 쓰기엔 내 역량 밖이라, 내가 아는 가족 이야기로 풀어가기로 했다. 전쟁은 남성의 일 같지만 여성의 희생이 훨씬 크고 많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6.25 참전용사로 인정받은 사람은 아버지 한분이었지만,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희생은 할머니들과 고모들과 엄마의 몫이었다. "우리 딸 생과부 만들었다"며 몸져 누우셨다가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전쟁은 이처럼 여성들의 삶을 전혀 다른 가게 한 거다. 뒤늦게 애도한다.
내가 발로 쓴 시민발언 글을 그대로 붙여 본다.
안녕하세요? 해양동에 사는 안산 시민 김화숙입니다.
저는 6.25 참전용사 아버지의 딸로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 아버지는 6.25 당시, 결혼 날짜를 잡아놓은 상태에서 보국대로 끌려가셨습니다. 보국대를 아시나요? 전시에 강제 징집된 민간인 부대인데요. 1951년 7월, 이승만의 긴급 명령으로 대규모 강제 동원이 시작됐습니다. 보국대는 ‘지게 부대’로도 불렸는데요, 온갖 작업과 물자 후송을 지게로 했대요.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폭격으로 전사자가 많았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영덕에서 제주도로 끌려갔는데 넉 달간 생사도 몰랐습니다. 다들 전사했다고 했답니다.
할아버지는 3.1독립만세 옥살이 후유증으로 일찍 돌아가신 집에 외아들은 보국대 가고, 할머니와 고모들은 가난 속에 전사 통지서를 기다리며 눈물로 살았습니다. 약혼녀인 저의 어머니는 신랑이 전사했다는 소문에 고통받았습니다. 외할머니는 "우리 딸 생과부 만들었다"라며 몸져누워 우시다가 석 달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술만 푸시고 어머니는 남동생을 맡은 소녀 가장이 됐습니다.
휴전이 되면서 아버지는 살아 돌아와서 결혼했는데, 두 분은 트라우마에 시달렸습니다. 또 전쟁이 날까, 또 끌려갈지 가슴이 벌렁거리는 거죠. 저의 오빠가 10.26과 12.12에 5.18 전두환 시절에 32개월간 군생활했습니다. 오빠 소식을 들을 수 없어 어머니가 울며 기도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 남동생 역시 노태우 시절에 27개월 포병으로 군생활했는데 너무 무거운 장비를 들어서 허리를 다쳐 아직도 그 후유증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영천 호국원에 모셔져 계십니다. 아버지, 오빠, 남동생 그리고 조카들 3대를 병무청은 ‘병역명문가’라고 합니다. 참전용사요 전쟁의 '숨은 영웅'이라지만, 뒤집어 말하면 3대에 걸친 전쟁 피해자라 해야겠죠. 국가가 민간인의 생명과 노동력을 어떻게 착취했는지, 여성의 아픔과 희생을 어떻게 모른 척했는지 말이죠. 군복이나 철모도 없이 총알받이가 되고, 생사조차 확인 안 되는 분들에 비해 제 가족은 ‘다행’인 경우였다고 입을 다물어야 할까요?
어머니와 할머니가 견뎌낸 아픔과 희생에 대해 국가는 영웅이라 하지 않죠. 기록으로 남기지도, 기억하지도 않죠. 저 역시 군인의 연인이었고 두 아들이 모두 1급을 받아 군복무를 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최전방 GP에서 복무할 동안 시국 뉴스에 심장이 벌렁거리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제 큰아들이 박근혜 정부의 북풍 몰이 속에 군대 갔을 때 전쟁의 공포가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그 아들이 미국에서 일하는데요. 회사를 옮기면서 비자 받으러 작년 말 한국에 왔다가 4개월간 발이 묶였다가 갔습니다. 배낭여행으로 이란을 몇 번 간 게 트집잡혀, 이란 가서 뭐 했냐, 누구 만났냐, 일일이 증빙해야 했습니다.
호주 시드니 ‘안작 메모리얼(ANZAC Memorial)’에서 본 기념 동상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전쟁기념관인데요, 거기 제목이 ‘희생’인 형상 앞에서 제가 눈물을 흘리고 말았거든요. 널브러진 전사자 군인 한 명을 여성 세 명이 어깨로 받치고 있더군요. 세 여성이 누굴까요? 한 여성은 아기까지 안고 있어요. 어머니, 아내, 자매겠죠. 전쟁은 결코 남성들만의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전쟁의 무게와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하는 건 결국 수많은 여성이란 걸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우리 아들들을 또 전쟁터로 보내겠다고요? 얼마나 더 아이들과 여성들이 죽어야 할까요? 우리 아버지가 겪은 비극을 우리 손자들에게까지 대물림해야 할까요?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아픔을 제 손녀들에게 대물림해야 할까요? 전쟁 영웅도 3대 병역명문가도 말고, 3대 평화 명문가 새 역사를 쓰고 싶습니다! 우리 아들딸들에게 물려줄 가장 좋은 선물은 평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