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의 소설《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토론하고
260414. 화. 맑음. 26/7
이프 토론 덕분에 클레어 키건의 얇은 소설《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었다. 작년 연말에 개봉 영화로 보고 여운이 길었던 작품인데 소설로 읽고 영화를 찾아서 또 보았다. 책을 읽고 다시 보니 참 잘 만든 영화였구나, 새삼 발견하고, 얇은 책으로 묵직한 질문을 던진 작가에게, 감독에게 박수를 보내는 하루였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도대체 뭘까?
삶에서 사소한 거라 여겨지는 것들이 실은 사소한 게 아니란 말을 하고 싶었을까?
사소하지 않은 건 그럼 뭐지?
거창한 서사도 사건도 큰 갈등 구조도 없는 소설이다. 내 맘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문제였다. 도대체 뭐가 사소하다는 건지, 사소하지 않은 건 뭔지, 그걸 구별하는 기준이 뭔지 알고 싶었다. 우선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종교만 해도 결코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녀원이 운영하는 '막달레나 세탁소'라는 곳 역시 그랬다. 가톨릭 국가 또는 사회 속에서 침묵하며 사는 여성들. 그들의 몸과 노동 등,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남성 주인공 펄롱이었다. 여성 작가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쓴 남성 캐릭터, 솔직히 살짝 몰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그는 가톨릭 교회에 나가는 '정상성'을 다 가진 남성이면서, 동시에 심리와 행동에서 전형적인 남성이 아니었다. 딸 다섯인 아빠, 반복되는 과거 회상 장면, 어머니의 죽음과 미시즈 왓슨 집에 살던 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모습, 그리고 수녀원에 갇힌 세라를 향한 연민. 그는 현실에 코를 박고 사는 무심한 남성은 분명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영웅적이라거나 거룩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신자도 아니었다. 결말에서 자기 마음을 따라 세라를 구출해 내고야 만다. 그 일로 그가 겪게 될 어려움을 계산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라를 구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어려움보다 구하지 않음으로써 겪을 어려움이 더 커서 했을 것이다. 즉,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로 평생 마음에 짐을 지고 살 순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그건 펄롱의 마음에 일어나는 이런 감정들을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남들은 사소한 감정에 매여 수녀원에 척지는 일 하지 말라 하지만, 그는 자기 느낌에 솔직했다. 미시즈 왓슨이 어린 펄롱과 어머니에게 베푼 그 존중과 친절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소한 친절이 없었다면 그와 어머니도 막달레나 세탁소에 가야 했다는 걸 그는 알았다. 때문에 그 작은 연민과 호의를 세라에게 베풀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사소한 것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면, 사소한 것들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는 말도 된다. 남성 펄롱이 여성 수녀와 나누는 대화를 보자. 여성 수녀가 어찌나 여성혐오적이고 성차별적인 말을 하는지, 읽기 민망할 정도다. 이게 어찌 사소한 문제란 말인가.
“딸이 다섯인가요, 여섯인가요?”
“다섯입니다, 원장님.”
그때 수녀원장이 일어나 찻주전자 뚜껑을 열고 찻잎을 저였다. “그렇긴 해도 섭섭하겠지요.”
수녀원장은 펄롱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섭섭하다고요?” 펄롱이 물었다. “어떤 게요?”
“이름을 이어갈 아들이 없다는 거요.”
수녀원장이 심각하게 말했지만 펄롱은 그런 말을 오래전부터 늘 들어와서 익숙했다. 펄롱은 몸을 살짝 뻗으며 신발 끝을 반들거리는 놋쇠 벽난로 펜더에 댔다.,
“저는 제 어머니 이름을 물려받았는데요. 그래서 안 좋았던 건 전혀 없습니다.”
“그랬나요?”
“딸이아고 섭섭할 이유가 있나요?” 펄롱은 말을 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딸이었죠. 감히 말씀드리지만 원장님도 그렇고, 누구 식구든 절반은 딸이잖아요.” 7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