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치뤄지는 가혹한 소설 쓰기
수.행.평.가
고등학교 아이들에게 이번 학기 수행평가로 이력서 작성을 과제로 냈다.
2035년, 너희가 서른 중반일 때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가정하고 이력서를 써보라고 말이다.
물론, 양식, 절차, 작성방법, 예시, 등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주었고 평가기준도 사전에 공개하였다. 요즘 젊은이들의 워크도구이자 협업도구, NOTION을 사용하게 했다. 템플릿을 알려주고, 사용법을 알려주고. 수업시간에 하고 다듬을 시간을 따로 좀 주고 제출하게 한다. 이런 저런 눈치를 많이 보며 내준 과제다. 이런 거 아니면 언제 상상이나 해보겠나. 10대가 감히 30대의 삶을. (우리학교는 대체로 열심히 하는 분위기고, 이런 수행을 또 아이들이 잘 해내고, 또 그렇다고 많은 부담이 가는 정도는 아니다 --- 그렇다고요. 방어치기)
왜 하필 2035년.
보통 고등학교에서 초점을 맞추는 시기는 대학과 대학 졸업 후다. 전공을 하고 무엇을 할거니?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새내기로서 어떤 삶을 상상하니? 뻔한 거 아닌가, 취업이요. 요즘은 거의 회사 취업을 꿈꾼다. 그게 디자인 회사든, IT회사든, 금융권이든 회사 취직. 아니면 공무원.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그래서 너희가 그 업에서 하고 싶은 게 뭐야? 무슨 프로젝트를 하고 싶은데?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 그거 해서 뭐가 좋은데? 질문을 이어간다. 10대에게 20대도 거치지 않았는데 30대를 생각하라니,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싶다. 나도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 30세 이후의 삶을 상상한 적이, 아니 상상하지 못했다. 그건 엄마 아빠와 같은 큰 어른이 지나간 나이였고, 나에겐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그런 으른의 나이였다. 20대를 상상하면 기대되고, 신기하고, 뭔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나이였지만, 30대를 생각하면 뭔가 무겁고, 가을의 색처럼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29세에는 30이 된다는 것이 무척 인생의 저주인냥 친구들끼리 서로 놀리곤 했었다. 막상 30대가 되고는 하루하루가 너무 좋았다. 아, 이렇게 좋은데 그럼 40대는 얼마나 좋을까 싶을정도로.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10대인 지금의 나의 아이들은 어떤 30대를 그리고 있는지. 너희 인생 30대 중후반, 그 땐 어떻게 살거니? 그 때의 너희는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삶을 향해 걸어가고 있니? 이 수행과제의 시작점이고,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거 선생님, 월급 타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슈
돈 많이 벌어서 부자될 건데요 - 부자되고 싶어? 그런데 왜 공무원을 해? 안정적이어서? 부자되고 싶다며? 일단 월급 적당히 벌고 싶어? 좋은 차 타고 싶다고? 아, 여행도 다니고? 집도 산다며? 와!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몰아가면 참 재밌다. 요즘은 워낙 정보가 많고 주변에서 하는 얘기도 많고 부모님의 사고도 예전처럼 무조건 공부 열심히 해라가 아니라서 아이들이 하는 대답은 정말 다양하다. 그리고 직업군도 '돈 버는 일'과 '명예를 얻는 일'로 나뉘는데, 전 시대엔 후자가 우세했다면 요즘은 전자가 우세하다. 이른바 쩐의 시대다. 그래, 뭐 다 좋다. 쩐과 먼 교사라는 업을 택한 나로서는 너희가 쩐을 선택하든 명예를 선택하든 지금 여러 소양을 갖춰 예쁜 마음 담을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가준다면 거 참 보람있는 일 아니겠어. (눈물을 훔치고) 아무튼 미래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아무튼 행복한 일이니까. 그런데 더 먼 미래로 설정해보면 또 얘기가 다르다. 그리고 조금 더 먼 미래를 상상해보면 그렇게 지금의 나로 이어져 어떻게 살아야할지 사뭇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고, 지금 그 시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상상력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례를 봐야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탐구하고 연구하는 사이, 우리는 조금씩 성장한다. 나에게서 벗어나 타인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을 무척이나 성장하게 한다. 그러는 나는 50대를 생각해본다. 50대를 살고 있는 선배들과 다른 분야의 50대를 살고 있는 분들을 본다. 그리고 배운다. 뭐든, 하나라도. 아, 나는 50대에 뭐 하고 있을꺼니, 살아...는 있겠지?
아쉬움
막상 안내하고 나니 빠트린 게 생각나서 조금 아쉬웠다. 실패한 경험도 써보라고 할 걸. 실패했지만 도전했던 경험도 녹여보라고 말이다. 거의 소설을 쓰라는 건데, 그랬어야 더 재밌었을텐데... 아니면 다들 지 잘난 것만 써내려 갈텐데 말이다. 뭐, 피드백 시간에 물어봐야겠다. 예상되는 리스크는? 그리고 다음 학기엔 아이들과 미국 상장 회사에 대한 정보 읽는 방법을 같이 배우고 어떤 회사에 투자하겠는지, 그 이유를 써보고 발표하라고 해야겠다. 매우 흑심과 사심 가득이다.
다음 주 목요일이 기다려지는 이유
사실 교단에 선 초창기에 왜 교사가 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했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대리 만족이라도 하려고요" 왜, 애들은 꿈이 다양하니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랑 몇 개는 겹치고 또 내가 몰랐던 세계를 탐구하는 아이들도 있을테니 고러면 또 재밌을 것 같고... 그렇게 다음 주 목요일이면, 몇 십 명의 인생이 내게로 쏟아진다. 어떤 소설을 썼을까, 어떤 청사진을 그렸을까, 다음 주 목요일이 너무 기다려진다. 힘든 채점, 재밌게라도 해야 하고, 힘든 생기부 세특 글쓰기 재밌게, 진심으로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내일은 알림을 한 번 해줘야겠다. 며칠 안 남았다고. 읏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