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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교사 Jul 28. 2023

10년 차 교사 악귀를 경험하다

전공책을 만졌더니


방학이다.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왔다. 계획은 뒹굴과 늘어짐의 교향곡이었으나 집안 곳곳에 깃든 나의 과거가 참 부지런하게 만들었다. 앨범을 열어보고 옛 물품을 꺼내보며 시간 여행을 했다. 그때라고 따로 떼어 보지만 모든 점들이 이어져 지금의 내가 있다. 지금 내가 만나는 아이들의 때의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때 내가 했던 생각, 고민, 감정, 염려가 떠올라 진지해지기도 했다. 철없고 생각 없는 청소년기였다고 생각했는데 사진과 일기장 속의 나는 누구보다 생각이 많았다. 그때의 내가 귀여운 건 시간과 감정의 거리 덕분이리라.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능력이다.



그러다 구석에서 잠자코 있던 전공책이 눈에 들어와 열어보았다. 책을 만지니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쏟아졌는데 마치 드라마 <악귀>에서 주인공 김태리가 악귀에 들린 후 그에 관한 물건을 만질 때 악귀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은 현상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건 온전히 나의 기억이었다는 것. 맞아 이런 걸 배웠지. 이런 게 중요했지. 이런 걸 이렇게 소화시켰지. 하는 이론적인 추억과 공부를 한다고 폰을 방 밖에 두고 점심을 많이 먹으면 졸리다고 소식하며 공부했던 몸의 추억이 떠올랐다. 책 구석구석 긍정과 확언으로 마인드 컨트롤한 흔적도 보여 그때의 마음이 참 기특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내 큰 마음을 먹었다. 모두 정리했다. 버렸다.



몇 년 전, 이사를 할 때 부모님 댁으로 나의 과거를 보냈었던 마음에는 언젠가 보겠지 하는 마음이 20% 정도 였다. 나머지 80%는 책으로서의 가치보다 한때 내 청춘을 바친 시간에 대한 존중이었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인데 당연히 간직해야지 하며 보관한 일종의 트로피 같은 의미였다. 그래서 지난 몇 번의 부모님 댁 방문에서도 방 한편을 차지한 책들을 봤을 때 정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부모님이라도 냉정히 이야기해서 다른 사람에겐 고물에 불과할  것들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 오늘 미련 없이 책을 전부 버렸다. 책을 버리며 이 추호도 미련 없는 마음은 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일단은 지난 몇 년을 통틀어 보니 앞으로도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 열어 볼 것 같진 않았다. 내용이 필요해 열어볼 일이 생기더라도 요즘 세상에 이 종이책 외에도 볼 방법은 많기에 유효성과 필요성은 더 이상 소장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80%였던 내 청춘의 증거물로써는 어떨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어느 때의 열과 성을 다한 시간에 대한 증거와 트로피가 이제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난 10년의 시간 속에서 그것들은 모두. 내 마음과 몸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내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누구보다 나 스스로가 알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용기와 실천의 근원이 되었다. 그렇게 예전보다 단단하고 영근 마음으로 과거의 것들을 후련하게 보내 줄 수 있었다. 부모님 댁의 방 한편에 이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가 쌓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정리를 하며 책마다 쓱 훑어보니 밑줄과 필기에 진정성이 가득이다. 공부를 한 건지 노동을 한 건지 펜 갈아 치워 가며 공부했던 그때가 생각났다. 그때의 마음이 그립기도 하다.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고 그게 우선이었고 그 자격을 얻게 되었을 때 참 기뻤고 감사했고 지금도 참 감사하다. 그러나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게 기뻤던 어느 때의 마음이 변했다. 선생님보다 교사라고 불리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이 자주 드는 요즘이다. 사명과 직업이라는 저울의 양쪽면의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할 때는 선생님으로서의 나를 돌아보고, 너무 몰입해서 마음이 힘들 때는 교사로서의 나를 돌아본다. 그렇게 여전히 학교가 좋다. 여전히 아이들은 예쁘다. 그래, 나는 학교를 좋아한다. 힘듦을 느껴온 어떤 순간들마다 주문과 같았던 말이 ‘아이들만 생각하자’였다. 변해가는 사회와 분위기에 헉헉하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사회의 큰 변화라고 생각했기에 그 흐름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고민한 시간들이었다. 초등에서 일어나는 진상 민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그 아이들이 중등에 올라오려나 싶었지만 아직은 남의 얘기였고 소수의 사례라 생각하기도 해서 또 밝은 면만 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민원 중에 건설적인 내용도 있기 때문에 좋은 상호 작용이 되기도 했다. 단지 관리자의 역량에 따라 교사가 보호받는 상황인지 아닌지에 따라 서글픈 상황을 목격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내가 오래오래 아이들을 만나려면 열정을 줄이고 교사로서 직업으로서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들 때가 있었는데 그게 가장 무서웠다. 열정이 없으면 가장 하기 좋은 것이 교사고, 열정이 있으면 가장 하기 어려운 것이 교사라는 말이 왜 자꾸 생각나는지. 매너리즘인가 하며 나를 돌아보려 애쓴 시간들이었다.



전공책을 후련히 보낸 그날 저녁, 서이초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과 분노와 슬픔, 그리고 수면 위로 떠올리지 않고 가지고 있던 저런 마음이 서로 뒤엉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본질을 흐리는 이런저런 기사나 말보다 무엇보다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진 그 사랑스러운 마음이 꺾인 것이 참 속상하고 애통했다. 그리고 꼭 이런 일이 발생해야 뭐가 움직이는 이 사회가 애석했다. 그 애석의 대상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교사만큼 모래알 같은 집단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잘 뭉치지 않는다고 우리 입으로 말한다. 현장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기도 하다.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그다음을 이어가야 하는 이로서 묵직한 생각을 해나가고 있다.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누군가 떠나야만 수면 위로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이 서글프면서도, 선생님의 떠남에 대한 본질이 흐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단순히 교사 학부모 학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같이 옮겨주시던 아빠가 물으셨다.

”중등 신규교원 연수 자료?

이것도 버리는 거야? 아까운데? “


기다렸다는 듯 내 입은

”응, 다 내 머리에 있어~“

하고 허세를 동력 삼아 움직였다.


입이 운을 뗐으니

이제 몸이 움직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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