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사정으로 조퇴를 해야 해서 보강을 부탁드린 수업이 있었다. 웬만하면 조퇴는 수업이 없을 때 하는데, 그날은 조금 그랬다. 그리고 주말을 보내고 그 반 수업이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씩씩하게 교실로 입장해서는 포문을 열었다.
"여러분 잘 지냈나요? 지난 시간에 과제 잘했지요?"
그러자 대뜸 가장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말한다.
"선생님 지난 수업에 왜 안 오신 거예요? 보고 싶었잖아요."
와, 이렇게 훅 들어올 줄이야. 사실 이 말은 수업에 늦게 들어오는 학생들에게 내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디 갔다 이제 와! 보고 싶었잖아. 빨리 들어와" 그러면 우물쭈물 들어오던 녀석들이 베시시 웃으며 죄송합니다 인형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 하는 말은 뭐든 먹힌다. "다음에 또 늦으면 진짜 가만 안둬!" 가만 안 두는 것이 무엇인지 나도 모르지만, 보통은 이렇게 후반부에 한 번 세게 콕 박아주며 으르렁 대며 밥값을 한다.
역으로 당하니 기분이 묘하다. 단지 나의 부재에 대한 이유를 묻는 거였다면 "프라이버시" 하고 농담처럼 넘겼을 텐데, 이어지는 7글자에 잠깐 정신을 잃었다. 진심일 수도 있고, 사회생활일 수도 있고, 그런 말이 너무 쉬운 아이일 수도 있지만 모든 경우의 수는 중요하지 않다. 선생님의 부재를 기억하고 궁금해한다는 것 자체가 고마울 따름이다. 10대의 관심은 생각보다 교사에게 있지 않기에. 게다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는 것이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라는 나만의 숭고한 관계학적인 면에서 이건 굉장히 바람직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평소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런 수업론을 설파하던 날라리 교사였기에 이 순간은 수업론이 현장에서 구현됨을 확인하는 굉장한 순간이다.
"우리는 수업을 통해 3가지를 배우고 키우는 거야. 지식, 통찰력, 그리고 사회성 또는 사회생활. 마지막 것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
정말 답이 궁금한 것인지, 단지 안부를 묻는 것인지 오묘한 질문을 받은 나는 눈빛을 반짝이며 과도한 제스처를 취하며 대답했다.
"어머, 감동이야. 언제 이렇게 컸어"
그리고 덧붙였다.
"자, 이제 더 가르칠 것이 없구나. 하산하여라"
듣고 있던 다른 아이들도 옅은 웃음을 입가에 품고 교과서를 열었다.
그렇게 부재의 이유는 자연스럽게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수업은 참 따뜻하게 흘렀다.
보통은 재미없고 힘든 공부의 분위기가
아이가 건넨 따뜻함으로 조금 풀렸다.
힘든 공부에 진입하는 최고의 수업 도입이었다.
교사와 학생의 콜라보로 이루어 낸 가장 최고의 도입이었다.
매일의 수업이 그런 건 아니기 때문에
오래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오랜만에 글을 남기는 지도 모른다.
이런 따뜻함 때문에 많은 선생님들이 힘들어도 학교에서 근무하는 보람을 느낄 것이다.
더는 선생님들이 이런 따뜻함을 뒤로 하고, 마음 아픈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따뜻함을 누리는 내가 죄책감이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선생님들이 지켜졌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