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핑크도 안 되는구나
수행평가로 환경 캠페인을 열었다. 마침 우리는 모두 너무나 더운 여름을 보냈고, 온몸으로 느낀 기후 변화라 시의적절한 주제라고 확신했다. 환경에 관한 영어 표현을 배우고 내가 지킬 수 있는 환경 보호 방법을 영어로 써보고 일정 기간 동안 직접 실천해 보다가 정해진 날 모여 환경 일기를 써보는 형태로 디자인했다. 디테일을 준비할 때 조금 더 잘 전달할 방법을 찾다가 어떤 선생님께서 공유해 주신 환경에 관한 연설문 활동지가 있어서 이거다 싶었다. 연설자가 블랙핑크였기에 아이들의 집중도를 확 높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럴 때 신이 난다. 실제 영상도 있고, 영어표현도 좋고, 길이도 딱이다. 미디어를 장식하는 환경 관련 표현을 영어로 배우고 체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기회에 블랙핑크라는 아이돌이 도와주니 이 수행이 진행될 3차시는 분명 생동감 넘칠 거라 믿었다.
수업 디자이너의 작품이 공개되던 날, 아이들은 먼저 기후변화하면 떠오르는 어휘를 마인드맵으로 정리하며 생각을 넓혔다. 그리고 평소 자주 쓰는 기후 변화, 이상 기온, 친환경, 대체 에너지 등에 대한 영어표현을 배우는데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블랙핑크 영상으로 화룡점정을 찍겠구나 싶어 수업 디자이너는 신이 났다. 대망의 더블클릭 따딱과 함께 블랙핑크가 교실에 나타났다. 짜잔~! 학습자의 눈높이와 흥미에 노력한 결실이 맺기 직전이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더욱 생동감 있어지겠다. 그렇게 배움이 촉진되겠구나!
https://youtu.be/DXKtt8c0Kac?si=Tng69ieaz57pIEHV
영상이 시작되자 아이들 눈이 커졌다. 교실이나 수업과는 결이 조금 다른 블랙핑크의 공연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영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익숙한 공간에 낯선 음과 장면이 쏟아지니 순간 집중도는 확 올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이내 아이들의 표정은 시큰둥해졌다. 제니와 로제, 리사가 돌아가며 뱉어내는 영어 말을 열심히 따라 듣는 모습 외에 흥미롭거나 쏙 빠져든 것 같은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영상에서 심해 발광어 lanternfish를 볼 때의 눈빛이 훨씬 좋았다. 수업 디자이너인 본좌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실 별 기대 없이 시작했다면 충분히 좋은 분위기였지만 세계적인 아이돌이 수업 시간에 나오면 아이들의 학습 동기가 배로 상승하고 몰입도가 증가할 거라 생각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기대만큼 당혹감이 컸다.
영상에서 나오는 표현을 배우고, 다시 한번 살펴보고 따라 하며 배움을 이어갔다. 그리고 수업을 정리하며 물어봤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여러분, 블랙핑크 안 좋아하나요?”
조심스럽게 뱉은 질문에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얘기했다.
“별로요~”
당찬 대답에 확인사살을 당한 듯했으나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그럼 여러분은 어떤 아이돌 좋아해요?”
갑자기 아이들 눈빛이 변한다. 초롱초롱하게. 그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친다. 각자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스트레이키즈요!”
“뉴진스요!!“
“NCT요!“
“투바투요!”
“아이브!!”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 이름이 아는 것도 있고 처음 듣는 것도 있어 나름 업데이트가 빠른 편이라 자부했던 오만이 배움의 길은 아직도 멀구나라는 겸손으로 변했다. 그렇구나. 블랙핑크는 이제 아이돌이 아니라고 한다. 어른돌이라고… 영향력이 일도 없다고… (참고로 이 친구들은 중3. 개인별 취향일수도 있으니 블핑 팬분들이 보시고 열 내시지 마시길..)
동방신기, 지오디, 핑클, 조성모에 미쳐 살던 10대를 보낸 선생님은 교무실에 돌아오자마자 스트레이키즈를 검색했다. 없던 안면인식 장애라도 생긴 것 마냥 모든 멤버다 똑같은 사람 같다. 방탄소년단 얼굴을 구분하는데 걸린 것보단 오래 걸리겠지만, 곧 알아보마. 오늘도 조금 더 너희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하고 있단다. 다음 기후연설은 뉴진스가 해주면 참 좋겠다. 모든 아이돌이 세계의 이슈와 생각해 볼 논제를 한 번씩 다뤄주면 좋겠다. 교실의 생동감과 배움의 진정성을 위하여.
아무튼 조미료의 효과는 기대 이하였으나, 아이들은 저마다 한 달 동안 실천할 환경 보호 행동을 다짐했고, 배운 표현을 사용하여 한 달 후에 환경 일기로 표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조미료 없는 요리의 진정한 맛은 그때 보여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