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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영미 Jul 22. 2020

소셜 미디어의 축약적 글쓰기의 문제점

글쓰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

요즘 매리언 울프가 쓴 [다시, 책으로], 김성오와 엄기호가 쓴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라는 책을 읽고 있다. 

매리언 울프는 인지신경학자이자, 아동발달학자이다. 읽는 뇌 분야의 세계적 연구자로, [책 읽는 뇌]를 비롯해서 읽기와 관련된 책들을 썼다. 이 작품 [다시, 책을-Rerder Come Home]은 '디지털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의미'라는 부제에서 알려주듯이 디지털 시대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소셜 미디어의 축약적 글쓰기와 읽기로 학생들에게 특이한 현상을 소개한다. 학생들이 글쓰기에 인용한 문장 대다수가 인용 자료의 첫 페이지나 마지막 세 페이지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다들 알 수 있을 거다. 미디어 글을 읽을 때 꼼꼼히 읽기보다는 F자나 지그재그 형태로 읽기 때문이다. 나도 경험한 바다. 심지어 대학생들이 인터넷 글을 그대로 퍼오거나, 조금씩 내용을 수정해서 과제로 제출하기도 한다. 내용 역시 비판적 사고나 논리적 근거 없이 결론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소셜 미디어의 축약적 글쓰기(미디어 요구하는 00자 글쓰기)가 학생들에게 어려운 비판적, 분석적 사고를 견디는 인지적 인내심을 잃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결국 소설미디어의 읽기와 쓰기가 비판적, 분석적 사고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의견에 일정 부분 수긍이 간다. 나 역시 미디어 글을 꼼꼼히 읽지 못하는 편이다. 지그재그 형태로 읽는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 같다. 짧은 시간에 어수선한 지하철과 같은 공간에서 뉴스를 읽다 보니 그렇기도 할 것이다. 기사를 읽은 뒤 댓글을 보면 왜 기사에 적힌 부분을 읽지 못했는지 의아할 때가 많다. 그래서 다시 기사의 그 부분을 찾아서 읽곤 한다. 같은 기사인데도 해석의 차이를 보며 놀랄 때가 많다. 그래서 기사와 댓글을 동시에 보면서 기사의 정확한 의도와 사실을 찾기도 한다. 또한, 댓글의 놀라운 유머와 센스에 기사보다 댓글을 더 열심히 읽고 있기도 하다. 

 

매리언 울프의 주장에 수긍하지만 한편으로 리터러시의 변화와 매체, 그리고 환경의 변화로 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성오, 엄기호가 쓴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는 리터러시의 개념을 '읽기, 쓰기, 영상, 사운드'와 같이 다매체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리터러시의 상호성, 스펙트럼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복잡성을 인식하기 위해서 반드시 긴 글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시'를 그 예로 들었는데, 그림책 역시 같은 맥락을 갖는다. 짧은 글이지만 복잡하고, 텍스트 읽기와 함께  '그림읽기'가 필요해서 굉장히 많은 메타포를 이해해야 한다. 재밌게도 이 책에는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가 많이 인용된다.


매리언 울프는 깊이 읽기는 언제나 '연결'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읽기는 우리가 아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과 삶의 방식과 연결된다고 했다. 매리언 울프가 말하는 '연결'은 김성오, 엄기호가 말한 '내재화'와 연결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책에서 말하는 리터러시의 지향점은 바로 타인의 대한 깊은 이해가 아닐까 생각된다.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은 나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세계와 타인을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김성오와 엄기호는 리터러시의 오용으로 리터러시 능력을 가진 자들의 특권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이 분에 대한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 역시 내가 가진 리터러시 능력을 마치 특권처럼 자랑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만 같다. 


요즘 에런 버커의 그림책 [사샤의 돌] 서평을 쓰고 있다. 작년에 읽고 서평을 쓰기 위해 2주간 틈틈이 책을 보는데도, 읽을 때마다 내가 놓친 부분들을 찾게 된다. 

'내가 작년에 저 책을 제대로 읽기는 한 것인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평은 후배와 같이 하고 있는데, 지금 하고 있는 게 네 번째 책이다. 서평 쓰기는 우연히 통화를 하다가 시작되었다. 그림책 한 권에 대한 이야기를 세 시간 넘게 통화를 한 적도 없었지만 서로 너무나도 다른 관점이어서 놀랐고, 끝없는 수다가 즐거웠다. 늦은 밤 통화여서 끊었지, 만약 낮에 시작한 통화였으면 아마 다섯 시간 이상 계속되었을 것 같다.  

전화를 끊고, 그녀가 말한 근거를 보면서 다시 그림책을 보니 그림책이 또 그렇게 보였다. 그러고 나니 그 사람에 입장에서 왜 그렇게 보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사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깊이 읽으니 다양한 관점이 생기고, 나와 다른 관점을 이해할 수 있어서 기분이 들떠 있는 요즘이다. 이것이 진정한 리터러시의 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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