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로 본 인간의 본성
주식시장은 돈을 벌고 잃는 곳 이상이다. 인간의 욕망, 감정, 환상이 얽힌 무대다. 이 무대에서 나는 과연 승자일까, 호구일까? 아니, 애초에 그런 게 의미가 있을까?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 봉, 영화 타짜,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오가며 시장과 인간 본성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끝에서 발견한 건 혼돈 속 깊은 통찰이었다.
1. 시장은 군중의 감정으로 춤춘다
르 봉은 말했다. “군중 속에서 개인은 이성을 잃고 감정에 지배당한다.” 주식시장은 이 말을 증명하는 생생한 실험실이다. 2017년 비트코인이 2만 달러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은 “더 오른다”는 열광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급락, 그리고 손실. 2024년 10만 달러를 찍었을 때, 그때의 “호구”는 “승자”가 됐다. 시장은 탐욕과 공포, 군중의 전염된 감정으로 출렁인다.
투자란 결국 “나보다 바보한테 사서 나한테 바보에게 파는” 게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바보인지 아는 눈이 없다면? 타짜의 대사가 떠오른다. “이 판에서 누가 호구인지 모르면 내가 호구다.”
2. 승자와 호구, 덧없는 이름표
비트코인 사례는 묘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2만 달러에서 판 사람은 단기 승자였지만, 10만 달러를 못 보고 떠난 패자였다. 정점에서 산 사람은 당시 호구였지만, 버티면 승자가 됐다. 승자와 호구는 시간과 관점에 따라 뒤바뀐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말한다. 돈, 주식, 가치는 모두 인간이 만든 “공유된 신화”다. 우리가 “이게 가치 있다”고 믿는 순간에만 의미가 있다. 시장의 숫자는 신화의 그림자일 뿐, 시간이 지나면 “승자도 패자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3. 이성과 감정,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다
시장에서 이성은 군중의 광기에서 나를 지켜주지만, 감정이 없으면 그 광기를 읽을 수 없다. 단타는 군중의 단기 열정을 노리고, 장타는 더 큰 신화를 믿는다. 하지만 둘 다 보장된 길은 아니다.
르 봉의 군중은 감정에 휩쓸리고, 하라리의 인간은 신화에 끌린다. 이성과 감정은 도구일 뿐, 시장의 불확실성을 뚫을 절대 열쇠는 없다. 어쩌면 중요한 건 “정답 찾기”가 아니라, 그 줄타기 속에서 나만의 춤을 추는 법일지도.
4. 인간의 본성이 시장을 혼돈으로 만든다
왜 손님 없는 가게에 내가 들어가면 사람이 모일까? 왜 주식시장은 버블과 폭락을 반복할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의 행동을 신호로 삼고, 감정은 전염되고, 신화에 동화된다.
이 본성은 협력을 낳지만, 시장에선 비이성을 키운다. 군중의 열광은 주가를 띄우고, 공포는 바닥을 친다. 그 흐름을 읽는 눈이 필요하지만, 아무리 날카로운 눈이라도 혼돈의 끝을 알 순 없다.
5. 모든 것은 결국 무(無)로 흐른다
“승자도 패자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 이 말이 이 여정의 끝이었다. 하라리의 렌즈로 보면, 시장의 승패는 순간의 환영이다. 비트코인이 10만 달러든 0원이든, 우주적 시간 속에선 먼지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환영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돈을 벌고 잃는 과정, 군중과 춤추는 순간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 어쩌면 시장은 승패의 무대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혼돈 속 나만의 춤
투자는 군중의 광기를 읽고, 그 속에서 나를 지키는 게임이다. 하지만 정답은 없다. 이성이든 감정이든, 단타든 장타든, 결국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눈조차 또 다른 신화일 수 있다.
그래서 깨달았다. 시장은 혼돈이고, 그 혼돈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유로워진다. 승자도 호구도 아닌, 그냥 나로 존재하며 이 춤을 즐기면 어떨까? 당신은 이 무대에서 어떤 춤을 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