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 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온전히 나만이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평가와 조언을 듣지만, 내 존재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굉장한 사람'으로 혹은 '형편없는 사람'으로 정의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생각의 차이가 아닙니다. 내 삶의 방향키를 성장과 행복으로, 또는 위축과 불행으로 설정하는 근원적인 선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곡된 거울로 자신을 보고 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인식하는 모습은, 과거의 경험과 사회적 피드백이 만들어 낸 '감정 기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굴절된 상(像)에 가깝습니다. 어린 시절 들었던 날카로운 비난, 쓰라렸던 실패의 기억, 타인의 인정에 목말랐던 순간들이 잠재의식에 새겨져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자동 항법 장치를 만듭니다.
이 왜곡된 거울은 우리 본연의 가치를 제대로 비추지 못합니다. "나는 부족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라는 속삭임은 진실이 아니라, 오래된 상처가 만들어낸 메아리일 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던 것은, 바로 이 거울이 왜곡되었음을 직시하고, 거울에 비친 상이 아닌 '참된 나'를 탐구하라는 위대한 촉구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억 년을 이겨낸 '최고의 유산'이다
관점을 바꿔봅시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나의 DNA 안에는 수억 년의 시간 동안 굶주림, 질병, 전쟁 등 상상할 수 없는 위협을 모두 이겨내고 생존에 성공한 조상들의 '최고의 유전자'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고 긴 생존 경쟁의 최종 승리자이며, 내 존재 자체가 바로 성공의 증거입니다.
우리 몸속 세포 하나하나에는 우주의 가장 강력한 원리인 '복리적 성장 구조'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장은 결코 1+1=2처럼 선형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미하게, 그러나 꾸준히 쌓여 어느 지점, 즉 '임계치'를 돌파하는 순간 폭발적으로 일어납니다. 마치 오랫동안 잠잠하던 주식 그래프가 수직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우리의 잠재력은 '퀀텀 점프'를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결정하는 열쇠, '자기 정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계치'에 도달하기 전에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미미한 초기 성과를 자신의 한계로 규정하고, "역시 나는 안돼"라며 스스로의 부정적 예언을 실현시키고 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 정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열쇠로 등장합니다.
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이것이 바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복리 투자 기간'을 견뎌내고, 마침내 퀀텀 점프를 이룰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원동력입니다.
스스로를 '수억 년을 이겨낸 위대한 존재'이자 '복리 성장의 잠재력을 가진 우주적 존재'로 정의하는 사람은, 눈앞의 더딘 변화를 '실패'가 아닌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오늘의 작은 노력이 미래의 폭발적 성장을 위한 투자임을 신뢰하기에,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정의가 나의 생각을 결정하고, 그 생각은 나의 가치관과 행동을 빚어내며, 마침내 나라는 존재의 에너지 차원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긍정주의가 아닙니다. 내 안에 내재된 생물학적 사실과 우주적 원리를 신뢰하고, 나 자신을 그 위대한 흐름에 맞추는 가장 합리적이고 용기 있는 선택입니다.
오늘,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선언하십시오.
나는 내 안의 위대한 잠재력을 믿으며,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나의 정의가 곧 나의 세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