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고 믿었던 것들이 무너져 내린 순간
혹시 ‘진정한 답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저는 한때 이 말을 그저 희망적인 구호로 여겼습니다. 직장에서 고민될 때 “내 마음대로 하면 되겠지!”라고 가볍게 넘겼죠. 하지만 우연히 접한 한 과학 논문이 이 문장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 순간, 제가 ‘나’라고 믿었던 모든 것(의지, 결심, 계획)은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Systems Age: A single blood methylation test to quantify aging heterogeneity across 11 physiological systems'라는 논문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논문은 혈액 검사로 뇌, 심장, 간 같은 장기의 노화 속도를 알아낼 수 있다고 했죠. 면역세포가 마치 정찰병처럼 몸을 돌아다니며 각 장기의 상태를 DNA에 기록하고, AI가 그 기록을 분석해 건강 점수를 매긴다는 원리였습니다.
처음엔 “신기한 기술이네”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내 몸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정교하게 소통하고 있다면, 내 의식은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 이 질문은 저를 내면 깊숙이 끌어들였습니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코끼리와 조련사’ 비유가 길잡이가 되었죠. 우리의 마음은 이성적인 조련사(의식)와 거대한 코끼리(무의식, 감정, 본능)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현명한 조련사라고 믿지만, 사실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건 코끼리의 힘입니다. 조련사는 종종 코끼리가 이미 걷기 시작한 길을 따라가며 “내가 이 길을 택했어!”라고 외치는 대변인일 뿐이죠.
예를 들어, 저는 친구와의 사소한 오해에도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에 밤새 뒤척였죠. 이건 제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 안의 코끼리가, 제가 알지 못하는 깊은 이유로 불안의 길을 택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코끼리는 왜 특정 길로만 가려는 걸까요? ‘진정한 답은 내 안에 있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여기에 있습니다. 답은 조련사의 머릿속이 아니라, 코끼리를 움직이는 삶의 지도(나만의 뿌리의 원리)에 있죠. 이 지도는 유전적 기질과 어린 시절부터 쌓인 경험, 상처가 얽혀 만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부모님께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코끼리는 늘 누군가의 승인을 갈망하는 길로 나를 이끌 수 있습니다. 제 경우, 상사의 짧은 표정 변화에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알고 보니 어린 시절의 작은 거절들이 제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죠. 이 깨달음은 저를 자책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왜 나는 늘 이럴까?”라는 절망 대신, “내 코끼리는 이런 이유로 이 길을 걷고 있구나. 그 뿌리는 어디서 왔을까?”라는 따뜻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현명한 조련사는 코끼리를 억지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대신 그 언어를 배우고 마음을 열어줍니다. 당신도 잠시 멈춰 자신의 코끼리를 들여다보세요. 반복되는 감정(화를 내는 순간, 피하고 싶은 상황)속에 어떤 패턴이 있나요? 그 뿌리를 탐구하는 간단한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기 쓰기: 하루 5분, “오늘 내 마음을 흔든 순간은 뭐였지?”를 적어보세요. 그 속에 코끼리의 발자취가 숨어 있습니다.
질문 던지기: “이 감정은 어디서 왔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뭘까?”를 부드럽게 물어보세요. 답이 바로 나오지 않아도, 질문은 코끼리를 깨우는 다정한 손길입니다.
고요한 시간: 명상이나 산책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세요. 세상의 소음이 잦아들 때, 코끼리의 속삭임이 선명해집니다.
저는 어느 날, 불안이 밀려올 때 이렇게 속삭여봤습니다. “괜찮아, 이건 내 코끼리가 오래된 기억을 들려주는 거야.” 그 순간, 묘한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이 여정의 끝에서 저는 놀라운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내 안의 코끼리는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수십억 년의 진화와 인류의 흔적을 품은 우주의 산물입니다. 내 몸의 원소는 별의 폭발에서 왔고, 내 DNA는 40억 년간 이어진 생명의 승리입니다. 내 무의식에는 인류의 지혜와 상처가 강물처럼 흐릅니다.
'나'라는 존재는 결코 초라하지 않습니다. 우주와 생명이 ‘지금, 여기’를 통해 드러나는 장엄한 통로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불안, 상처, 반복되는 패턴조차 그 위대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수십억 년의 역사를 품은 경이로운 우주입니다.
삶이 답답하거나 반복되는 패턴에 지쳤다면, 잠시 멈춰 코끼리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세요. 당신은 당신만의 운명, 그리고 내 안에 잠든 우주를 동시에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