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vocado Apr 09. 2021

이제 겨우 한걸음 내디딘 설계 쟁이의 걸음마

첫 직장 그리고 꿈과 도전의 1-4장

첫 직장 그리고 꿈과 도전의 1-3장 : 첫 번째 임무에 이여서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고대하던 프로젝트 팀에 배치가 되었다. 들어간 팀은 8Mb GDRAM (8 Mega Bits Graphics DRAM)이라는 제품을 설계하는 팀이었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32 bits data bus (메모리 제품에서 x32, x16, x8이라 하면 한 번에 읽고 쓰는 데이터의 크기를 이야기한다)를 제공하는 그래픽 처리용 메모리였다. 첫 번째 버전은 T/O (일반적으로 반도체 분야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 Tape Out의 약자로 설계가 완료되면 실리콘 공정 진행을 위해 마스크 필름을 제작하는 데이터를 제조 부서나 혹은 외주 업체로 보내는 단계, 예전에는 magnetic tape 형태로 저장하여 전달하였다는 유래에서 아직도 반도체 업계에서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이 완료된 상태라 실리콘 칩 제조가 진행 중이어서 매일 아침 출근하면 제일 먼저 어느 제조 공정 단계에 와 있는지 체크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일을 통해 제조 단계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매일매일 프로젝트 리더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는데 하루라도 공정이 지연되면 공정 팹(Fab, Fabrication의 약자로 반도체 제조 라인을 보통 지칭한다)에 전화해서 이유를 묻거나 진행을 부탁하는 것도 하는 일 중에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미리 정해진 일정이나 진행하는 제품의 우선순위에 따라 자동적으로 제조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프로젝트 리더가 워낙 유별(?) 나다 보니 하루라도 밀리면 참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나에게 포토마스크 (Photo Mask, 실리콘 기판에 회로를 현상하는 데 사용하는 필름 같은 것)가 들어오니 입고장에 가서 받아서 마스크를 들고 직접 팹에 전달해주고 오라는 지시가 있었다. 겨울은 아니었지만 추운 날씨에 외주 물품창고에서 포토마스크를 가지고 오는 차량을 한참을 기다리다 받아 공장 라인에 전달해 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자동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지체되는 시간마저도 아까우니 설계자들이 가끔 들고뛰어서 가져다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우선순위가 높은 프로젝트는 삼성 내부 마스크 하우스에서 만들어 일정도 짧지만 어떤 제품의 경우는 외부 마스크 제조 업체에 의뢰해서 만들다 보니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던 싫다거나 하찮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신입사원으로서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긴 여정의 도입부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즐겁게 생활했던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하며 더 어마어마한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배치받은 팀이 이미 디자인 아웃을 하고 반도체 칩이 만들어지는 단계이다 보니 실제 설계에 참여하는 업무보다는 후공정 즉, 회로를 실리콘 기판에 찍기 위한 포토마스크 제작이나 제조공정 추적, 테스트 셋업, 불량분석 등이 주로 이루어졌고 틈틈이 단위 회로 설계에 대해 공부하고 시뮬레이션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사실 학교에서는 디바이스 물성을 배울 때 주로 Bipolar 나 PN junction의 물성적인 부분을 배우다 보니 회로 구동에 대해 다룰 일이 많지는 않다. 뭐 본인이 관심이 있어 따로 공부하고 실험해 보는 경우는 있지만 여전히 실무에서 요구하는 내용과는 괴리가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메모리에서 대부분 사용하는 소자는 CMOS라 불리는 소자인데 학교 다닐 때는 이름만 들어봤지 실제 공부해 본 적이 없었다. 원리를 보면 PN diode의 연장선에 있고 구동의 이해는 도리어 쉽기까지 한데 접해본 적이 없으니 처음 봤을 때 이게 쉬운지 혹은 어려운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지금이야 구동 방식이나 원리, 회로들이 많이 오픈되어있고 널리 알려져 있다 보니 구글링만 잘해도 웬만한 자료들은 볼 수 있는 시절이지만 예전만 해도 구전되어 내려오는 :-) 아니 회사 내의 자료나 선배들의 노우하우로 알 수 있는 특화된 부분이었다. 특히 메모리 구동은 아날로그와 디지털 회로의 합성이라 단순히 0과 1의 조합으로 구동을 구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꾸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다른 글에서 기회가 된다면 누구가 알기 쉽게 메모리 구동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다. 



  회로를 만들기만 해서는 실리콘 기판 (요즘은 12인치 사이즈가 많은데 오래 전만 해도 8인치가 대세이고 혹은 6인치도 간간히 연구 라인에서 사용되곤 하였다)에 새길수가 없으니 우선 레이아웃이라는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고 각 공정별 디자인 룰에 따라 일일이 엔지니어의 손으로 그려져야 한다. 요즘은 디지털 회로의 경우는 100% 자동화로 그려지는지라 사람의 손을 타는 경우는 조건을 셋업 한다든가 아니면 일부 자동화가 아닌 full custom 회로, 특히 아날로그 회로 같은 것에 대해서만 사람이 직접 그리거나 디자인한다. 아무튼 그 당시 메모리는 100% full custom 방식이라 디지털이던 아날로그던 사람이 직접 회로를 설계하고 레이아웃이라는 실리콘 기판에 그릴 그림을 완성해야 했다. 사실 회로를 설계하는 분야와 레이아웃을 하는 분야는 크게 전문성이 나누어져 있어서 보통 레이아웃은 그것을 전문으로 하는 엔지니어의 손을 타게 되는데 순서는 회로 설계자가 완성된 회로를 넘겨주면 레이아웃 담당자가 CAD tool을 이용해서 도면으로 완성하게 된다. 가능하다면 -내 경험에 의해 강조하는 부분이지만- 설계자의 경우 레이아웃의 패턴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서 레이아웃 패턴의 길이나 위치 혹은 모양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배성 저항, 기생 Capacitance (짧게 Cap이라 명하기도 한다)와 같이 회로 구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를 미리 생각해서 동작시 발생할 에러율을 줄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설계자가 이에 익숙해지려면 회로가 어떻게 레이아웃으로 그려지는 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서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시대가 바뀔수록 자동화 툴들이 좋아지다 보니 컴퓨터에 의존하여 저항과 Cap과 같은 Loading Factor 들을 쉽게 추출하여 설계에 반영하지만 때에 따라 사람의 눈썰미와 감각으로 보다 정밀하게 조건을 세팅하기도 하고 필요 이상의 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 기계나 장치의 발전은 우리를 편하게 하지만 그것을 설계하고 만드는 것도 사람의 감각과 지성을 필요로 한다. 언젠가는 아니면 오늘 이 시간에도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간의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우리의 숨결을 끊임없이 부어 넣을 여유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년 차 중반쯤 PMOS, NMOS와 같은 단위 소자에 대한 패터닝은 눈에 익숙하리만큼 연습을 많이 하여 금방 이해가 가도록 하였다. 어느 날 퇴근 무렵에 (지금 생각해 보면 퇴근에 가까워 무언가 일을 새로 시작하거나 질문을 한다는 것은 나의 실수였다.) 선배에게, 지금도 미국에서 근처에 살고 계신 선배임, 반도체 레이아웃 도면 (잠시 여기서 또 샛길로 빠져 도면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때만 하더라도 dot printer가 전부였고 레이아웃을 검수하기 위해서 커다란 종이에 color dot printer로 일일이 프린트해서 엔지니어들이 보곤 하였다. 구글에서 오래전 사진을 찾아보면 인텔의 엔지니어들이 커다란 프린터 용지 위에서 열심히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도면이 사무실 여기저기 있어서 각자 맡은 부분의 회로가 제대로 그려져 있는지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장의 대문 사진도 레이아웃 도면의 일 예이다.)에 있던 특정 회로에 대해서 묻고 답하던 중 선배가 퇴근하면서 도면 위에 연필로 커다랗게 원을 그리시더니 “내일 아침에 원안에 있는 회로가 뭔지 추출해서 같이 이야기하자” 하시고 퇴근하셨다. 고작 단위 Transistor 레벨의 모양만 익숙할 뿐 아직 게임 레벨 0인 나한테 다가온 시련이었다. 어쩔 수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날 밤을 새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겨우겨우 수도 없는 수정을 거쳐서 reverse engineering을 통해 나름 확신과 함께 회로 추출을 완료하고 아침에 선배가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같이 보는 내내 불안하면서도 어찌나 뿌듯하던지, 아니나 다를까 선배의 한마디는 ”야 고생했다 밤샜냐? 제법인데 그런데 여긴 좀 틀린 거 같다. 이리 와봐 같이 보자 뭐가 틀렸는지" 긴장되었지만 즐거운 순간이었다. 차곡차곡 나를 만들어가면서 인정받고 절대 서두르지 않으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배움은 먹고 살기를 떠나서 늘 즐거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겨우 한걸음 내디딘 설계 쟁이의 걸음마와 앞으로 지새울 수많은 밤샘의 서막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첫 번째 임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