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그리고 꿈과 도전의 1-3장
부서에 배치된 첫날, 모든 회사가 비슷하지만 각 팀을 돌아다니면서 인사드리고 이야기 듣다 보면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간다. 돌이켜 보면 그나마 그때가 칼출근 칼퇴근하는 유일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매일 아침 와서 먼저 한 일은 개발 팀장님 옆 회의 테이블에서 메모리 제품에 관련된 Spec (Specification, 제품의 규격과 동작을 설명하는 문서)을 공부하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Spec이라 하면 메모리 사용자가 해당 제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에 대한 매뉴얼 같은 것인데 말이 매뉴얼이지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면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TV를 새로 산다고 하면 포함된 사용자 매뉴얼에는 어떤 버튼이 파워이고 또 어떤 것을 누르면 채널이 바뀐다든지, 일반 사람 누구나 글을 알고 약간의 센스만 있으면 금방 이해하는 것이 내용인데, 이 메모리 Spec 혹은 매뉴얼은 우선 영어로 쓰여 있는 데다 각종 용어들과 약어들이 익숙하지 않았다. 물론 용어나 약어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지만 상상하는 것처럼 그다지 초보자들에게는 친절한 문구들이 아니다. 또 요즘에는 구글에 찾아보면 못 찾는 내용이 없고 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서로 경쟁적으로 잘 설명하려는 자료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1994년 당시는 하이텔이 최고의 인터넷 창구이고 HTML로 된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었다. 삼성전자 연구소라 하더라도 인터넷을 쓴다는 것이 없던 시절이라 신입 사원이 새로 접하는 지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커다란 벽과 마주 서고 있는 것과도 같았다. 다행히도 많은 선배들을 통해 배울 수 있었으니 그것이 그 당시에 유일한 업무 지식을 넓히고 채우는 방법이었다. 그 외 선배들로부터의 내림은 다른 곳에서 또 이야기하도록 하고 다시 처음 배치되었던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돌아가 보자.
하루의 반나절 즉, 점심 먹기 전까지 또는 어떤 날은 점심 먹고 퇴근할 때까지 매일 스펙과의 싸움이었고 간간히 팀장님의 테스트 아닌 테스트를 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와 보니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경쟁 업체에서 출시된 메모리 제품인 것으로 기억한다. 완제품인 반도체 칩의 상태는 플라스틱 Package로 둘러 싸여 있고 많은 다리들이 나와 있는 형태인데 (요즘은 예전과 달리 기능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Package가 이용된다.) 내가 본 것은 플라스틱 표면을 완전히 벗겨낸 작은 실리콘 칩 상태로만 놓여 있었다. 보통 이것을 Decapsulation이라고 하는데 외부 표면을 완전히 제거하니 메모리 칩이 어떻게 생겼는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상태였다. 다음에 Decapsulation 혹 간단히 Decap에 대한 일화는 다른 장에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팀장님 왈 “둘이 실험실 가서 칩 전체를 확대 촬영해서 회의실 옆 공간에 붙여놓도록 구조가 어떻게 되나 보게" 순간 드디어 첫 번째 임무가 주어지는구나 생각하며 같이 있던 입사 동기와 즐거운 마음으로 실험실로 향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분야가 그렇지만 경쟁사의 제품이 출시되면 구매해서 어떻게 생겼는지 분해해보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요즘은 유튜브나 각종 블로그에서 최신 IT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제품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도 분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핸드폰이나 텔레비전 같은 조금 큰 제품들은 부품수는 많지만 분해 후 대략 기구적인 구조가 눈에 쉽게 들어오는 반면 반도체 칩은 작은 표면에 드러나는 형태로 자세한 것을 알기는 쉽지는 않다. 다만 메모리 칩과 같이 데이터 저장 영역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거나, 특정 기능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용되는 구조들의 패턴을 관찰하면, 대략적인 기능의 배치나 아키텍처는 전문가의 눈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물론 복잡한 구조의 Application Processor 같은 경우는 표면으로 드러난 것으로 구조를 파악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나, 해당 분야에 익숙한 전문가라면 어느 정도의 구조는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별한 형태의 전혀 새로운 구조나 패턴이 아니라면 오랜 시간 보고 또 만들고, 기능하는 부분의 패턴 등을 그리다 보면 자연히 파악하기가 수월할 것이다. 전문가 달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많은 시간 수없이 반복하고, 그 반복의 바탕 위에 새로운 것을 만들고 창조해가는 것이다. 하는 일에 따라 분야에 따라 시간의 양은 다르겠지만 숙달되기 위한 시간의 합은 결코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부푼 가슴을 앞으로 하고 도착한 실험실에는 평소 써 본 적도 없는 폴라이드 카메라가 있었는데 앞으로 며칠 동안 이것과 씨름하며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유일한 장비인 것이었다. 우리는 구도를 잡고 어떻게 공간을 나눠서 작업할지 생각하고 찍기 시작했는데 껍데기 (플라스틱 Package)를 제거한 실리콘 표면이 일정하지 않다 보니 배율을 한쪽에 맞추면 한쪽이 안 맞는 등 결코 쉽지가 않는 작업이었다. -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실리콘 표면에 존재하는 절연성 물질이나 플라스틱 등이 Decapsulation 과정에서 깨끗이 제거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어떠한 화학 약품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표면 처리 상태가 많이 다르다. 이에 대한 에피소드도 다른 장에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 불균일한 표면을 감안하여 겨우 현미경으로 위치를 잡고 사진을 조금씩 찍기 시작하였다. 하루면 다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며칠은 작업해서 겨우 끝낼 수 있었고 그때 사용한 폴라로이드 현상 용지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커다란 박스 몇 박스는 사용해서 완료할 수 있었다. 찍은 수백 장의 사진을 들고 회의실 옆 벽에 조각조각 위치를 잡아가며 붙여서 모양을 만들어가는 것은 마치 퍼즐 맞추기와 같았다. 서로 비슷한 사진이 많아서 뒷면에 적어놓은 번호를 조심스럽게 배열해 가며 어렵사리 붙일 수 있었는데 완성하고 보니 어느 부분은 조금 어둡게 찍힌 것도 있고 또 어느 부분은 밝게 찍힌 부분이 있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운 작품이 완성되었다. 팀장님께서 완료된 작품울 보시고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하실 때 내심 회사 들어와 처음 느낀 뿌듯함이 몰려왔고 며칠 손에 잉크 무쳐가면서 고생한 보람은 있구나 생각했다.
뒤돌아 보면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들어온 지 며칠 안된 메모리 설계 신입사원이 운 좋게 메모리 구조에 대해 일일이 사진을 찍어가며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흔하지 않은 기회라 생각한다. 생각 없이 시작했던 반복되는 작업을 통해 머릿속에 의미 있는 이미지의 잔상을 만들어가고, 또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나중에 시간이 지나 알게 되었을 때는, 나도 점점 설계 쟁이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반복은 아마도 창조의 밑거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