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그리고 꿈과 도전의 1-2장
4주간의 합숙교육을 마치고 바로 이어지는 추가 교육, 교육 장소는 중구 을지로 예전 삼성 본관 건물이었다. 그 주변에 삼성 계열사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교육기간 내내 집에서 출퇴근하기에는 어렵지 않은 위치였다. 무슨 교육이었는지는 오래전 일이라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중간중간에 월급 통장도 만들고 신용카드도 신청하고 했던 일 들이 생각난다. 뭐니 뭐니 해도 점심시간이나 교육을 마친 후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기억은 교육시간에 있었던 일 보다 더 생생하다. 주변에는 남대문시장, 본관 건너편 북창동 등 주변 회사원들이 많이 이용하는 음식점들이 많았는데 연수원 때부터 같이 붙어 지내온 동기들과 식사를 같이하는 시간이야말로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길지 않은 날들을 같이했던 시간이었지만 각자 자기 위치로 가기 전 즐거운 시간이었음은 틀림없었다. 일반적으로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은 메뉴를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재미있겠으나 여러 사람이 같이 움직일 때는 메뉴 선택에 있어 합의점을 만들어야 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음식점마다 여러 가지 메뉴는 있지만 중식이냐 한식이냐 등의 큰 틀은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늘 같이 먹는 사람들이 분리돼서 갈라지는 것보다 서로 합의점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돌출 과정은 다른 일의 처리와 많이 다르지는 않다. 이제 것 즐겨 찾던 옵션을 나열하고, 새로 주변에 나온 옵션 즉 식당을 더하고, 각자 머릿속에 있는 옵션들의 Pros/Cons와 시간에 따라 기다리는 risk, 일정 기간 동안 한 가지 메뉴로의 반복성 배제 등을 변수로 하여 결정 알고리즘에 집어넣고 짧은 시간 안에 휴먼 브레인을 신속히 돌려 두어 가지로 옵션을 압축하고 드러나지 않은 장단점을 비교 분석한 후 최종 결정을 하게 된다. 말은 길었으나 일련의 과정은 양자 컴퓨터 보다도 빠른 인간의 두뇌로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까지 계산하여 10분이면 충분하다. 물론 짜장면 짬뽕 중에 무엇이 더 좋을까 결정을 못할 때 다른 사람의 선택이나 결정으로 정했던 것처럼 어느 한 특출 난 점심 리더의 카리스마와 선택에 의해 그 시간은 더욱 단축되곤 한다. 어찌 보면 이렇게 소소한 일상의 선택도 복잡 미묘한 프로세스를 거치기도 하고 리더의 결정에 맹목적으로 따라 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의 반복적인 과정도 일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연습의 기회로 삼는 것이 어떠할지 지금도 상상해 보곤 한다. :-)
길지 않은 추가 교육을 마치고 대부분의 삼성전자 신입 사원이 온다는 삼성전자 반도체에 배치받아 또다시 교육이 시작되었다. 당시 전자 내에서도 사업부가 여러 개 있었는데 3개까지 희망 사업부를 적을 수 있었기에 무엇을 적을까 고민을 하였었다. 어떠한 사업부는 서울에 위치하다 보니 서울에서 나고자란 나로서는 당연히 서울에 위치한 사업부에 관심이 더 가는 것이 인지상정. 선택의 조언을 듣고자 몇 년 전 입사하신 선배에게 연락을 드렸는데 상담 직후 바로 옵션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1 지망 반도체로 적어 내 머릿속 프로세싱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나머지 두 곳의 희망 사업부는 영혼 없이 적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그 당시 또 하나 핫 했던 통신 관련 사업부 (지금의 무선 사업부)를 뒤로하고 아무런 무리 없이 최종 발령 난 곳은 대망의 반도체 사업부였다. 위치는 기흥, 삼성전자 반도체의 시작이자 핵심인 곳이다. 출퇴근 거리는 다소 멀어 지금 기억으로는 서울 강북 몇 개의 위치에서 회사 출퇴근 버스를 타고 다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지가 않다. 그 후 기흥 사업장에 있는 부서로 발령 난 직후 기숙사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서울 강북에서 기흥까지의 출퇴근은 쉽지 않은 거리였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선배의 조언을 듣고 반도체로 커리어의 방향을 정했던 이유는 그룹 차원의 반도체에 대한 집중과 투자에 있었다. 사업의 방향을 보고 가야 할 부서를 정했다기보다는 용써봐야 갈 곳은 정해져 있다는 다소 합리적인 선택과 집중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90년대 초 당시 삼성전자는 반도체 특히 메모리 분야에 많은 결실을 이루어 내고 있었는데 그만큼 신규 인력의 유입이 절실했던 시절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선택의 단순함이 효율성 있는 결과를 얻게 되는 요즘의 경우와 많이 다르지는 않다고 느낀다. 장고 끝에 악수라고 하는 것처럼, 고민하며 반복되는 선택으로 인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원하는 결과치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물론 내 처음 직업을 정함에 있어 대단할 것은 없지만 첫 단추가 잘 못 끼워지면 다시 맞추기 위해 다 풀어헤치듯이 추가적인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니 인생에 있어 결코 사소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올바른 정보를 빠르게 얻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가 핵심이다 보니 빨리 얻고 올바르게 분석해서 적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소 첫 직업 이야기하면서 거창하게 비교한 것 같아 무안하지만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해 작은 노력과 순발력은 필요하다 하겠으며 이로 인한 선택은 지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문제는 또 다른 선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메모리 사업부의 연구개발 전초기지가 경기도 용인시 기흥사업장에 위치하고 있었고 후공정과 관련된 부서가 대전 가까이에 있는 온양사업장에 있었다. 두 번째 선택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선택이라기보다는 남의 선택을 받음)의 기로에서 아무리 내려가도 기흥에 있어야 한다는 바람이 있었다. 물론 서울 중구 을지로 삼성 본관에도 삼성전자 반도체 조직이 있었으나 주로 인사, 마케팅 같은 관리직군이 대부분이라 나와 같은 엔지니어링 전공자가 배치받기에는 사실상 쉽지 않았고 엔지니어직을 희망한 내 바람과도 맡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을 수 있는 적지는 기흥인데 어떻게 온양이 아닌 기흥에 배치받을 확률을 높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온양에 보내질 인력도 필요했기 때문에 배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거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기흥 사업장에 고등학교/대학교 선배님이 계셔서 유일하게 기흥사업장에 있는 부서가 어디가 있을까 알게 될 기회가 생겼는데 메모리 개발의 핵심중에 하나인 메모리 설계팀이 기흥에만 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최종 부서 배치를 위한 인사담당자 면담에서 희망부서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내가 기억하는 답변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팀이 어디에 위치해 있던 메모리 설계팀에 가서 세계 최고의 메모리 개발에 공헌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실제 근무지로 온양에서 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있어서도 답변으로 "위치에 상관없이 메모리 설계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했던 기억이 있다. 결론적으로 원하는 바와 같이 메모리 설계팀으로 배치되었다는 사실. 뭐 그렇게 이야기해서 기흥에 남게 되었다 라기보다는 바라는 것에 운이 따라서 된 것이라 생각한다. 앞에 절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확한 정보의 수집과 이용은 어디에서나 매우 중요한 것이다.
대망의 메모리 사업부 배치를 받고 사업부 모 전무님 (나중에 제9대 정보통신부 장관까지 하셨던 분이시고 나중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삼성 퇴사 후 스타트업 시작할 때도 뵈었던)과 당시 같이 배치받은 대략 한 15명 정도의 동기들과 면담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면담 중 질문드렸던 것이 향후 DRAM (Dynamic Random Access Memory의 약자로 전원이 가해져 있을 때만 정보를 저장하는 메모리 소자의 하나이다. 나중에 다른 글에서 조금 더 자세히 비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게 다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다.) 메모리 칩 용량이 어느 정도 더 커져갈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전무님께서 한 256 Mbits (mega 보통 대문자 M으로 표기: digital data의 용량을 정의하는 단위이고 10의 6승의 이진수를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다) 정도 되지 않겠나 답변하셨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당시 16 Mbits DRAM이 상용화돼서 잘 팔리고 있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지금으로 보면 너무 적게 말씀하신 것 같지만 당시의 제품 양산 추이와 공정 개발 상황 또 회사 기밀로서 개발 진행되고 있는 다른 내용 등을 이제 갓 들어온 신입 사원들에게 자세히 말씀하신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나고 보면 이해되는 답변이라 생각한다. 무어의 법칙 (24개월마다 용량이 두배씩 커지는)을 적용하면 그때 당시 16M 양산이었으니 256M 양산까지는 약 8년 정도의 시간이 남은 샘이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64M가 94년 말 양산 출하되었고 256M는 개발 중에 있었으니 상당히 보수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이었다. 한 시간 조금 넘는 단체 면담시간 동안 사업부 내 어느 부서들이 있는지 듣게 되었고 면담 후 각 부서의 이름을 대시며 여기 가고 싶은 사람 손들라고 (하하 지금 생각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러나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부서 배치 방법으로 기억한다)하셔서 동기들 각자 희망하는 부서에 손을 번쩍 들었다. 별 무리 없이 부서 배치가 이루어졌으며 나중에 메모리 부서 내에서 어느 메모리를 할지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삶은 늘 선택과 고민의 연속이다.
당시 크게 메모리 종류는 DRAM (앞서 설명한 메모리), SRAM (Static Random Access Memory, DRAM과 같은 데이터 저장 메모리이지만 DRAM과 달리 주기적인 data refresh가 필요 없고 저장하는 memory cell의 사이즈가 몇 배는 크다, 이것도 나중에 비교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다), EEPROM (Electrically Erasable Programmable Read Only Memory, 이름과 같이 한번 저장해 놓으면 따로 지우는 절차를 가지지 않으면 전원이 없더라도 영구적으로 데이터 저장하고 있는 메모리이며 프로그램 해 놓으면 읽기만 가능한 메모리이다. 지금의 프레쉬 메모리처럼 리얼타임으로 쓰고 읽는 것이 불가능한 메모리이다), 그리고 요즘 하드디스크를 대체하는데도 쓰이는 Flash Memory (내 기억에는 초기 개발 단계이고 용량이 크지 않은 상태) 등으로 기억나는데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DRAM 팀으로 가기로 했는데 이유는 이름처럼 가장 다이내믹하게 개발되고 있는 제품이라 생각하였고 당시 핫한 제품군이라 개발인력이나 프로젝도 많아 매력적이다 생각하였다. 다른 이유에서는 DRAM 설계 팀에 계신 선배들의 적극성과 유머 그리고 왠지 모를 끌림 같은 것이 정하게 된 이유이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숨 가쁘게 지금까지 흘러왔지만 아직 일 년 차도 벗어나지 못했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짧은 시간 속에서도 몇 번의 선택의 과정이 있었는가 손꼽아 보았다. 자의든 타의든 주어진 길에 있어 자신이 후회하지 않게 걸어가도록 본인의 노력과 간절함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