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 그리고 꿈과 도전의 1-8장
멀더와 스컬리, X-file이라는 미국 드라마의 마니아라면 익숙한 이름들일 것이다. 지금에 와서 한국에 방영되었던 시점을 되짚어 보니 1994년부터였지만 흥미가 없었던지 내 기억 속의 X-file은 시즌 3,4가 방영되었던 1997년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매주 이어지는 테마는 외계인 혹은 정체불명의 미해결 사건에 대해 FBI 수사관인 주인공들이 추리와 논리로 풀어가는 내용들이다. 주인공인 멀더는 아웃사이더에 고집이 세고 자기 논리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조직에서 왕땅 와도 같은 존재였다. 파트너인 스컬리는 따뜻하고 냉철하며 지적이면서 멀더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환상의 콤비 같았다. 너무나도 유명한 드라마라 아마 많이 사람들이 알고 있고 지금도 가끔 예전 시리즈들은 즐겨보곤 한다. 누구에게나 알려지지 않은 음모론이나 외계 생명체와의 접촉, 각종 미해결 과제들에 대한 내용은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한 소재들이다. 드라마에 심취하다 보면 꼭 현재 일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고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한동안 여운이 남아 머릿속에 궁금증이 맴돌게 된다. 매주 월요일, 일주일 한 번만 방영되는 것이 야속하게 생각되었지만 다음 내용을 기대하며 돌아오는 월요일을 기다리는 즐거움은 직장인들이 종종 가지게 되는 월요병을 없애는 특효약이기도 했다.
갑자기 회사 생활 이야기하다 말고 X-file이라니 의아해할 것이다. 유명한 드라마이다 보니 어찌 마니아가 나 하나뿐이었겠는가. 바쁜 회사 생활 속에서 매주 월요일만 되면 즐겨하던(?) 야근도 뒤로하고 나를 포함한 몇몇의 골수 마니아들은 어느덧 퇴근 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1996년쯤으로 기억되는데 기흥사업장 정문 앞 농구장 뒤편에 있던 오래된 하얀색 연구동 건물에서 사업장 안쪽에 신설된 RS라인으로 설계팀 전체가 이동하였다. 새로 옮긴 사무실에서는 4명이 코너에 앉는 셀 구조의 형태였는데 보통 같은 제품을 개발하는 동료들로 이루어졌다. 여러 개의 셀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통로를 공유하는 형태였는데 크게는 두줄의 셀이 백투백으로 놓인 구조였다. 내가 위치한 자리에는 주로 후배들과 같이 앉게 되었는데 이른 아침 출근해서 아침/점심 심지여 야근하며 저녁까지 늘 붙어 다니니 주말 빼고는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료들 이였다. 정신없이 바쁠 때는 서로 말도 없이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다가도 밥때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밥 먹자는 선창을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식당을 향해 가곤 하였다. 신기하게도 내가 위치한 셀과 주변 셀의 선배와 후배들 중 월요일 이면 어김없이 정시에 퇴근하는 무리가 있었다. 다름 아닌 X-file 마니아들, 스컬리의 지성과 멀더의 촉으로 사건을 파헤치는 모습을 상상하며 비슷한 퇴근 버스에서 만나곤 하였다. 다음날이면 누가 시작한 것도 아닌데 아침 휴식 시간에 모여 앉아 어제 본 에피소드에 대한 서로의 의견과 추리를 늘어놓곤 하였다. 점심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담배 피우는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외계인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은 왜 눈, 코, 입을 다 막았을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존재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갔을까 등등 지난밤에 보았던 이야기에 자신의 추론을 더해 풀리지 않은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에피소드를 예측하곤 하였다.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반론을 하기도 하고 맞장구치며 추론에 동의하기도 하면서 월요병 없는 월요일과 에너지가 넘치는 화요일을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회사 생활이라고 한다며 그냥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고 기계적으로 일하다 퇴근 후 자유로운 자기 시간 동안 하루에 지친 심신을 달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겠지만 공통의 관심사를 나누는 동료들과 간간히 생각을 나눈다면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서로의 신뢰가 생기면서 가려진 팀워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당시 X-file이라는 매개체는 단순한 멜로물이나 코믹이 아닌 고도의 복잡한 스토리의 전개였으며 생각 없이 보다가 전체의 맥을 잃어버리는 드라마이다 보니 진정으로 드라마를 사랑하는 애청자라면 몇 번이고 되뇌며 내용 속 추리 지점에 있어야 했다. 혼자 하는 추리나 정리는 때론 많은 오류를 낳고 아집에 사로 잡혀 제대로 된 논리로 바라보기가 힘들다. 반면 같은 관심사를 갖는 여러 사람과의 의견 일치는 오류를 최소화하고 더 많은 아이디어로 결론에 빨리 다가가게 해 준다. 별거 아닌 드라마에서 시작한 것일 수도 있지만 동료들과의 같은 관심사를 통해 스스로 눈치채지 못하게 팀워크가 저절로 만들어진다면 일에서의 어려움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회사마다 동호회를 장려하고 같은 취미를 만들어 가도록 격려하는 것도 즐겁게 회사 생활하면서 일이 잘 풀려나가도록 하는 방법일 것이다. 지금이야 본방을 놓치더라도 여러 스트리밍 채널에서 다시 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시간 맞추어 비디오로 녹화해 놓지 않으면 다시 재방송을 보기 위해서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인지 본방 사수의 의지는 지금보다도 더 절실하였고 부서의 부장님이 뭐라 해도 월요일만큼은 절대 야근을 한다던가 혹은 다른 약속을 잡는다던가 하는 것은 우리 X-file 마니아들에게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지금도 지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기 위해, 일하는 자리 중간에 놓인 원탁 테이블에 모여 앉아, 자기 논리가 맞다고 소리치던 시절을 생각하면 다시 한번 돌아가 보고 싶은 과거의 한 장면이다. 아직도 가끔 아마존 프라임에서 예전 X-file 시리즈를 보면 여전히 흥미롭고 종종 예전 기억에 사로 잡히곤 한다. 각자 보는 눈은 다 다르겠지만 많은 미스터리를 다룬 드라마 중에 내가 생각하기에 X-file이 최고이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앞으로 이와 비슷하거나 더 훌륭한 작품이 나온다 하더라도 과거에 내가 가졌던 감성과 기억을 넘어설 작품은 없을 것이다. 작품과 어우러진 지나간 과거는 기억이 허락하는 한 늘 내 마음속에 리플레이되고 있다.
몇 개월에 한 번씩 프로젝트에 따라서 일하는 자리의 위치를 종종 바꾸곤 하였다. 1998년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일상처럼 4명이 한 조가 되어 자리에 배치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제일 선임이고 나머지 3명은 1~3년 아래의 후배들이었다. 자리 배치에 있어 우선 순의는 크게 부장님 자리에서 멀어지기, 창가에 가까운 곳이 있으면서 햇살에 노출되기, 복도 라인에서 멀어지기 등등 몇 가지 조건이 맞기를 바랐는데 이번에는 운이 좋게 열거한 조건들이 만족되는 자리를 배정받았다. 후배들하고의 사이도 좋아 일하는데 전혀 지장 없이 하루하루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자리에 앉으면 회로는 어떻게 고치고, 시뮬레이션 조건은 어떻게 잡으며, 결과 분석은 어떻게 마무리할지 등을 서로 이야기하고 공유하곤 하였다. 하루는 아침에 출근하여 보니 다들 열심히 프린트한 종이를 보면서 이른 아침 시간부터 공부하고 토론하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선배 된 나로서는 그런 후배들의 모습이 뿌듯하여 오늘은 사다리 끝에 내 이름만 적어놓고 간식 한방 쏘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을까 하고 뒤돌아 슬 적보니 전혀 본 적 없는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럿의 밥통은 몇 개, 방어력은 얼마, 메딕의 방어력은, 종족별 유닛의 형태와 종류는.... 순간 이게 뭐지 하면서 눈에 들어온 것은 게임 캐릭터들의 분석이라는 것. 순간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큰소리로 "아침 일찍 회사에 나와 뭐하는 짓들이야" 했던 기억이 난다. 분위기는 한동안 사늘해지면서 보고 있던 종이는 어느새 치워지고 다시 업무의 일상으로 돌아와 잊으며 일에 집중하였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저녁 시간만 되면 나만 빼고 3명이서 어디론가 갔다 오던가 아니면 퇴근을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 후문에 있는 PC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 배틀을 하는 것이었다. 퇴근 후 하는 것이니 뭐라 할 것도 없는지라 한동안 조용히 사라지는 후배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컴퓨터 게임 하나가 문화를 바꾸고 만들어 갈지 누가 알았겠는다. 스타크래프가 생기면서 회식으로 술을 먹거나 아니면 당구를 치거나 하는 것이 거의 없어지고 그때 당시부터 성행하던 PC방에서 게임 배틀의 삼매경에 빠지곤 하였다. 얼마 동안 퇴근 후 왕따 아닌 왕따로 지내다 도저히 외로움에 못 참아 후배들이 즐겨하는 스타크래프트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나도 끼워달라 하면서. 개인전, 팀 대항 등 하면 할수록 스타크래프트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후배들보다는 조금 늦게 시작한 감이 있었으나 꾸준한 연습으로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 당시 얼마나 급속히 퍼졌는지 설계실에는 선후배, 동기들 뿐만 아니라 몇몇 임원분들도 회식 후 2차는 게임방에서 단체로 스타크래프트를 할 정도였다. 어떤 때는 회식 후 수십 명이 근처 PC방에 몰려가 자리에 대부분을 차지하며 팀 대항 게임에 몰두했던 적이 있었다. 얼마나 유명하면 그 후 한국의 유명한 게임 플레이어들이 전 세계를 석권하며 e-sports의 원조가 되었다. 휴일에 틈만 나면 인터넷에서 내가 좋아하는 종족 -당시 테란이 최애 종족이었고 다음으로는 프로토스였다- 을 플레이하는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전략을 카피하고자 노력하곤 하였다. 이것은 X-file 이후에 새로이 불어 온 공감 아이템이었으며 누구도 싫어하지 않는 게임이라는 종목이었다. 현란한 손놀림, 순간 빠르게 회전하는 뇌, 재치와 순발력, 전후좌우 또 위아래 작전 가능한 멀티태스킹, 어느 하나라도 밀리면 수십 마리의 저글링과 더러운 초록색 침을 내뱉으면서 내려오는 히드라 때에 전멸당할 때가 허다하였다.
4명 이서하는 팀 대항은 서로 보조를 맞추어 가면서 밀고 들어가는 타이밍의 싸움이었다. 지금이야 마이크로 폰으로 대화도 하면서 할 수도 있지만 그때 당시에는 바로 옆에 같이 앉아 게임에 열중하면서도 급한 마음에 소리 지르면 몇 시 방향을 외치며 PC방을 떠들썩하게 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은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였다. 내가 테란을 즐겨한 이유는 사람처럼 생긴 유일한 종족이면서 제일 좋아하는 목소리인 "Nuclear Launch Detected"가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순간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띠며 고스트 전사의 유도로 한방에 바글거리던 저글링과 히드라 때를 통쾌하게 날려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타크래프트는 나중에 삼성을 나와 벤처를 시작했을 때 같이 시작한 스타팅 멤버들과의 팀워크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게임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의 1차/2차/3차 내리 술만 마시는 회식 문화를 바꾸어준 획기적인 게임이었다. 1차는 스타를 하기 위해 배를 든든히 하는 식사 시간이고 2차는 게임이 끝나 후 맥주 한잔에 사람들과 리뷰를 하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예전을 기억하며 스타크래프트를 해보면 슬프지만 예전 같지가 않다. 머릿속에 이미지는 이미 탱크 10대는 만들었을 텐데 실제 손동작과 머리 회전은 1대도 겨우겨우 만들고 있으니, 어느새 렌덤으로 선택된 컴퓨터의 상대 종족으로부터 전멸당하면서 절로 헛웃음이 나오곤 한다. 우리가 사는 곳의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 드라마나 게임과 같이 쉽게 접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점점 그러한 것의 종류나 가짓수가 기술의 발전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가상의 공간으로 까지 팽창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이제까지 쭉 그래 왔듯이 언젠가 영화에 보던 것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빨라지고 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X-file과 스타 크레프는 1990년대 후반부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아이템들이고 회사에서 동료들과의 추억이 그대로 남아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은 무엇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