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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Sep 23. 2021

호주 시골, 가뭄과 홍수를 겪으며.

100년 만의 홍수 현장은 이랬다.

난 살아오면서 홍수나 가뭄을 겪은 기억이 없었다. 대도시에 살아 그랬는지 어려서 개념이 없어 그랬는지 해마다 뉴스로 그런 소식이 날아들어도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지는 않았다. 아무리 가뭄이어도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고 홍수가 나도 우리 집이 떠내려 간 적은 없었으니까... 호주 시골에 와서 나이 마흔에 처음으로 가뭄과 홍수를 진지하게 고민해본 것 같다.


가뭄

온 천하를 뒤덮은 호주의 푸른 초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볼 때마다 탄성에 감동을 했었는데 어느 해부턴가 그 색깔이 이전 같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풀들이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가물게 몇 년이 더 지나자 그 누렇던 풀들마저 사라지고 붉은 흙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푸르렀던 초원이 끝 간 데 없는 붉은 민둥산으로 변했는데 마을 하나가 그런 게 아니고 산 하나가 그런 게 아니고 한반도보다 넓은 면적의 빅토리아주 전역이 그랬다. 그 붉은 겹겹의 산을 바라보노라면 타는 갈증과 고통이 느껴졌고 무섭고 두려워졌다. 이 많은 생명이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지다니.. 그런데도 손 하나 쓸 수가 없다니...


곳곳의 연못과 저수지 호수들은 다 타들어 사라졌다. 발라렛에는 일산 호수공원만큼이나 넓고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는데 지난 몇 년간 바닥을 드러냈었다. 도대체 그 자리에 호수가 있었다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바닥 위엔 물속에서 노닐던 물고기들이 말라 굳어 화석처럼 뒹굴었다. 레이크 볼렉이란 유명한 관광지가 있었다.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호수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그림 같은 곳이었는데

호수가 말라버려 사라졌다. 더 이상 관광객들은 찾지 않았고 관광 사업으로 살던 주민들도 생업을 잃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작은 마을은 폐허가 됐다.

 

양과 소등을 키우는 목장주들의 피해는 이보다 더 컸다. 풀들이 다 말라붙자 사료를 사다 먹였지만 그 비용을 감당 못해 굶겨 죽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남은 목축을 내다 팔고 목장 문을 닫거나 새로운 살 도리를 찾아 고향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나거나 좌절하여 자살을 했다.


정부에서는 대책과 방안을 모색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어디에도 없는 물을 끌어다 댈 수는 없었다. 그저 정원에 물 주기를 그만하라, 세차를 하지 마라, 샤워를 짧게 하라 같은 절약 방안들만 구호처럼 떠돌았다. 한 양재기의 물에 야채를 씻어 저녁을 하고 그 물에 설거지를 한 뒤 다시 행주나 걸레를 빨아 그 물이 진정 구정물(Grey Water: 회색 물을 사용하자는 캠페인이 있었다. 의식 있는 호주인들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물을 아꼈다.)이 되었을 즈음 뒷마당에 들고나가 장미와 꽃나무 사이에 조금씩 뿌려 주었다. 자잘한 꽃들은 정원에서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턱도 없는 양임을 알기에 주면서도 괴로웠다. 그렇게 가뭄으로 근 십여 년이 지났나 보다. 사람들은 이 호수가 이 강물이 예전처럼 다시 차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정하기 시작했다.


홍수


그러다가 지난 몇 년간 아주 조금씩 강우량이 늘었다. 그리고 올해 집중적으로 비가 왔다. 호주는 한국과 달리 겨울이 우기여서 요즘 한창 비가 왔는데, 특히 지난주에 며칠 간격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이곳의 폭우는 또 어떤가. 강한 비바람이 몰아칠 때면 집을 나설 수도 없다. 우산은 뒤집혀 날아가고 비는 쫄당 맞아야 한다. 체중이 가벼운 사람은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전에 멜번 거리를 걷는데 강풍이 불자 앞에서 걷던 할머니가 휘청대며 바람에 쓸려가는 것이 아닌가! 주변의 장정 몇이 할머니를 급히 붙잡아 근처의 벽에 붙여주었다. 운전을 할 때 차가 휘둘리며 제멋대로 간다. 


그 요란한 바람소리도 호주에 와서 처음 들었다. 바람 자체가 센 건지 허허벌판이라 그런 건지 나무가 많아서 그런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런 바람소리는 영화 속에서 '효과음향'으로만 들었었던 것 같다. 집이 다 날아갈 정도로 굉음이 휘돌고 온 집안 유리며 문들은 더 이상 붙어있지 못하겠다며 덜컹덜컹 딱딱. 그날 밤 6시간 동안 정전도 됐었다. 먹고살겠다고 촛불을 켜고 가까스로 뭔가를 끓여 먹은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며 이런 밤 전기를 고치는 사람은 얼마나 고통 속에서 일을 하는 것일까 남편과 함께 그들에 대한 미안함을 나누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온 동네에 물이 넘쳤다. 말 그대로 이번엔 '홍수'가 난 것이다. 마을 공원 안 연못에 물이 찬걸 처음 봤는데 동네 할머니는 근 2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내 죽기 전에 이걸 볼 줄 몰랐다'며 놀라워하셨다. 끊겼던 실개천이 다시 이어져 마을을 돌아 흐른다. 넘치는 물들은 어찌 알고 이 길을 찾아 도는 건지.. 20년 묵은 때도 다 쓸려갔다.

온 동네의 연못과 저수지 호수는 거짓말처럼 하룻밤 사이에 물이 다 차고 넘쳤다. 우리 식구도 사진기를 들고 동네를 돌며 처음 보는 모습에 놀라워하고 여기저기 물에 잠긴 모습을 걱정했는데,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군데군데 피해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 홍수를 무지 반기는 분위기였다.


지구 온난화나 기상이변이란 말들을 하도 들어 이제는 과거의 영화롭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자연은 또 이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을 해낸 거다. 물이 '찼다' 던가 '불었다'라는 표현을 언제 써야 하는 건지 이때 배웠다. 정말이지 라면도 아니고 물이 불은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가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아시아의 대도시에서 살았다면 끝없이 진화하는 인간의 지능을 놀라워했을게다. 내가 유럽의 고도시에서 살았다면 찬란하고 깊이 있는 예술과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인간의 내면과 감성을 찬탄했을지도 모른다. 그리나 지금 호주 시골의 대자연 속에 묻혀 사는 나는 그저 자연이 놀랍고 감동스럽고 두려울 뿐이다. 세상에서 설치고 사는 모든 인간들이 연약하고 우스워 보일 정도로.

 

자연 앞에서 21세기의 인류는 아직도 한심할 때가 많다. 이곳에서 메뚜기의 위력을 알았을 때가 그렇다. 일 년 동안 힘들여 농사를 지었는데 메뚜기떼가 쓸어먹어 농사를 망쳤다는 거다. 조그만 밭농사가 아니라 수십만 에이커 대평원의 농사를. '메뚜기'라니.. 난 그런 얘기는 구약 성경시대에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았았다. 펄벅의 '대지'에서도 그런 얘기가 나오긴 한다. 그 잘난 인간들도 결국은 메뚜기 떼를 이기지 못하고 물 한 방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니 기가 막히다.


난 그저 자연에 순종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고 싶다. 자연에 푹 파묻혀 흙에서 나오는 것들을 감사히 먹고 추우면 추운 데로 더우면 더운 데로 날마다의 날씨를 즐기고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로 족함을 아는 단순함 삶을.(2010/8/19씀))

맑고 잔잔했던 연못이 갑자기 불어난 물로 인해 탁해졌다. 그래도 그 넉넉함으로 인해 아름다워 보인다.
이곳엔 작은 낚시터와 벤치 안내판등이 있었는데 다 잠기고 안내판만 겨우 얼굴을 내놓고 있다.수심이 하룻밤 만에 일미터 이상 깊어진 것이다.
초원 위의 집들이 수상가옥이 되버렸다.
마을 아저씨가 자기 아이들을 세우고 기념촬영을 했다. 그래서 나도 한 장.
낮은 지대에 있어 피해가 컸던 갤러리
연못 위의 다리가 꼭대기만 간신히 남기고 다 가라 앉았다. 평소보다 수심이 2미터 이상 깊어졌나 보다.



호주가 물에 잠겼다. 지난주 퀸즐랜드 주에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홍수가 있었다. 간혹 안전을 묻는 지인들의 국제전화를 받았다. 퀸즐랜드와 우리가 사는 곳은 비행기 타고 서너 시간 걸리는 곳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연일 이어지는 뉴스를 보면서도 저 동넨 저렇구나 했다. 그런데 그 비구름이 남하하면서 빅토리아주도 위험할 것이란 예보가 며칠 뒤 이어졌다.     


지난주 목요일 잠깐 산책을 나간 남편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집에 늦게 들어올 거란다. 마을 주민들이 홍수를 대비해 모래주머니를 쌓는 일이 한창이라 같이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우비를 둘러쓰고 아들 손을 잡고 나가보니 부슬비 속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모래주머니를 쌓고 있었다. '낼모레 토요일이 고비야.' 

네 달 전 홍수로 피해를 입어 폐관했다가 지난달 간신히 일부 다시 개관한 갤러리 주변은 몰려든 사람들과 

모래를 실어 온 카운실(구청) 사람들로 복닥였다. 사람들은 허리가 끊어지도록 일했다. 70을 넘긴 노인이 끙끙대며 모래를 나를 때 저 할머니 내일 어쩌시려고 저러나, 걱정이 됐지만 사태가 시급하니 말리지도 못했다. 

미술관이 넓어 일 미터 높이도 안 되는 모래둑을 쌓는데 그리 시간이 걸렸나 보다. 그렇게 목요일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세상은 또 한 번 달라져 있었다. 디데이도 오기 전에 함께 모여 기를 쓰고 쌓았던 모래주머니는 제 구실도 한번 못해보고 다시 물에 잠겼다.     

  

이 홍수의 규모는 지난번 과는 또 달랐다.  비가 얼마 오지도 안았는데 이미 피해 규모가 네 달 전의 것을 넘어섰다. 지난번엔 십여 년의 극심한 가뭄으로 모든 것이 말라붙었던 상태에서 홍수가 났던 것이고 이번엔 이미 다 차있는 강이고 저수지라 조금의 비에도 바로 넘쳐흘렀던 것 같다.      


여기저기서 밀려들어 온 물이 범람해 삽시간에 온 동네가 물바다가 되었다. 마을은 가운데 강을 두고 두 동강이 났다. 집도 차도 다리도 다 가라앉았다. 어제까지 집을 구해보겠다고 기를 쓰던 사람들이 집을 버리고 피난을 갔다. 아주 작은 연못과 작은 다리가 있던 아담한 공원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물은 계속 불었다. 

다음날 상황은 더 끔찍해져 있었다. 낮은 지대에 있는 집들은 창문까지 물이 차올랐다. 몇 시간을 사이에 두고 수심이 일 미터씩 깊어진 것이다. 그래도 네 달 전의 경험 때문인지 마을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일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물이 붇는 것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동네는 홍수가 잘 나는 동네가 아니다. 지난 백여 년간 이런 홍수를 겪은 적이 없단다. 그런데 지난 네 달 사이에 두 번의 큰 홍수를 겪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놀라움에 걱정을 하면서도 침착함과 여유를 잃지 않았다. 많은 주민들이 사진기를 들고 나와 이 놀라운 광경을 찍기에 바빴다. 애고 어른이고 이런 홍수를 이 마을에서 본 적이 없으니까. 집은 잠기고 차는 가라앉고 냉장고는 떠다니고.. 그래도 인명 피해가 없어서 다행이다.     


가장 피해가 큰 갤러리. 지난달 재개장을 하면서 울먹였던 관장이 생각난다. 내게도 너무 특별한 곳이었는데. 

그녀는 더 이상 들여다볼 수가 없다며 금요일 아침, 마을을 휙 떠나 버렸다. 작은 가게를 경영하던 사람들이 다시 힘을 내 문을 열까, 혹시라도 이 참에 이 작은 마을을 떠나는 것은 아닌가.. 마을 사람들은 홍수 뒤 피해를 입은 자들이 얼마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까를 걱정했다. 


도대체 이 많은 물들이 어디서 흘러오는 것인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평화롭던 나의 산책길이 가로막혔다. 바다가 하나 어디서 나타나 떡하니 가로막고 있다니. 언덕 위의 집들은 피해가 없었다. 다행히 우리 집도 이 언덕 위에 있었다.    

호주 최대 일간지 에이지 신문기자가 취재 왔다. 무슨 이유로 그녀를 잠시 쫓아다녔다. '저기 우리 집이 가라앉아 있어요...' 기자에게 열심히 설명하는 할머니. 지난 홍수 땐 가든의 일부만 피해를 봤는데 이번엔 아예 집이 통째로 잠겨버렸다. 몸이 불편한 두 노인네가 경찰의 도움을 받아 일찌감치 대피를 했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옆집 엄마가 일간지 일면에 대문짝 만하게 실렸다.

   

"버틸 데까지 버텼지요. 하지만 대자연 앞에서 무슨 저항을 하겠어요. 물이 빠지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겠지요." 그녀는 말했다. 

자연 속에 살며 속성을 잘 이해해서 그런지 포기도 체념도 빠르다. 그 안의 쓰린 상처야 이루 말할 데 없겠지만 참으로 이성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인다. 

이제 비는 그쳤고 물은 대충 빠졌다. 아침 일찍 마을 사람들은 함께 모여 청소를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지치지 않고 힘을 모아 해나가야 한다. 하나씩 하나씩.... (2011년 1월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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