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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Jun 30. 2022

내 주변, 다국적 '이혼' 풍경

호주 바닷가,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도 감사히 마무리한다.

얼마 전 지인의 결혼 25주년 기념식에 다녀왔다. 결혼식은 많이 다녀봤어도 25주년 기념식은 처음이었다. 간간이 20주년이든 30주년이든 결혼을 기념하는 모임에 가보았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식사를 하며 담소하는 정도의 모임이었다. 이번처럼 리셉션 홀을 빌리고 두 주인공이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채 사랑의 서약을 다시 하고 반지도 나눠 끼는 정식 재 결혼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초대를 받은 나도 나름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 모임 전후로 내 안에 들었던 몇 가지 생각들을 나눠보겠다. 

  

1.     내게 25주년이 온다면 어떻게 기념을 할까? 


그녀는 대학생 딸이 만들어 준 핑크 빛 드레스를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예뻤지만 세월이 많이 느껴졌다. 이들은 식 중간에 새롭게 사랑을 맹세하고 피로연 중간에도 몇 번씩 스피치를 하며 그 간의 결혼생활을 회고했다. 무난히 잘 사는 커플이라 생각했는데 한때 결혼 상담실을 드나들 만큼 위기도 있었다는 고백을 하며 지금껏 깨지지 않은 가정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런데 뭔가 새롭게 시작을 한다는 설렘과 기쁜 에너지가 전달되지 않는 평범한 중년 부부의 소회로 느껴져 듣는 마음도 썩 상큼하거나 가볍지가 않았다. 


내가 25주년을 기념해야 한다면 이런 기념식은 치르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번거로운 걸 싫어하는 내가 거창한 식 준비를 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지인들이라지만 사적인 얘기들을 열거하며 주목을 받는 것도 불편할 것 같다. 난 차라리 그냥 둘이서 조용하고 따뜻한 섬나라로 여행을 얼마간 다녀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남편도 나랑 생각이 비슷했다. 아직은 먼 얘기이니 그 사이 맘이 변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2.     내 지인들의 이혼 소식. 


사실 이 부부는 10여 년 전 잠시 홍콩 교회를 다닐 때 만났던 분들이다. 늘 가까이에서 고민을 나누며 서로 잘 챙겼었는데, 사는 거리가 떨어진 만큼 자주 만나지 못했었다. 수년 만에 그동안 못 만났던 그 주변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나고 또 그 주변인들의 안부를 묻다가 놀라운 소식들을 들었다. 내가 알던 50대 초 중반의 세 커플이 그 사이 이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다가… 


내가 그들을 잘 알고 지냈었을 때 그들은 대부분 기러기 부부였다. 남편은 홍콩에서 일을 하고 부인은 자녀들과 호주에서 거주했다. 그러나 이들이 기러기가 된 사연은 한국과는 좀 달랐다. 1997년 홍콩이 영국의 식민 생활을 청산하고 중국으로 반환되는 역사적 시점을 앞두고 많은 홍콩인들은 미래를 불안해했다. 불확실한 정치 경제적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캐나다나 호주 등으로 줄줄이 이민을 떠났다. 한때 캐나다의 밴쿠버는 늘어나는 홍콩 이민자들로 인해 홍쿠버로 불리기도 했고 맛있는 얌차를 먹으려면 홍콩이 아닌 멜번으로 가야 한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었다. 왜? 유명 요리사가 죄다 멜번으로 이민을 왔으므로.^^ 


이들은 낯선 땅에서 물 설은 이민 생활을 하며 자국 사정을 끝없이 넘겨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홍콩은 반환 뒤에도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고 중국 진출의 관문이 되어 경제적으로 빠른 성장을 했다. 이국에서 생계를 위해 아무 일이나 하던 가장들은 홍콩으로 돌아가 자기 전문 분야에서 다시 일을 하기로 하고 부인과 자녀를 남겨둔 채 홀로 귀국을 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좋은 교육환경에서 잘 자랐다. 당시 10대였던 아이들은 이제 자라서 열의 일곱은 엄마들의 열성으로(?) 의사 변호사 회계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이들 부부들은 이혼을 한 것이다.       


그 한 여인이 마침 피로연 때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간만에 만나 반가웠는데, 그녀는 내 눈을 오래 못 보며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체구가 작아도 당당하고 사회적으로도 활동이 왕성하고 주변에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다 나서서 도와주는 여장부 같은 분이었는데, 너무 작고 힘없는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전남편은 당시 홍콩에서 큰 사업을 했었는데, 아들의 스무 번째 생일 때 비행기를 타고 온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호탕한 그는 가족을 잘 챙겼고 아들을 너무도 자랑스러워하며 행복해했었다. 

난 그녀의 소식을 아는 척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되었고 그녀 또한 뭔가의 망설임과 주저함으로 인해 대화는 짧게 겉돌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긴 시간 옆에 앉아 몇 코스의 요리를 먹는 동안 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녀는 작은 생선토막도 반을 남겼고 달콤한 초콜릿 케잌도 입에 데는 둥 마는 둥 했다. 우리는 서로 반가웠고 불편했고 힘들었다. 


이들이 홍콩인이 아니었다면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는 시기가 아니었다면, 이들 앞에 다른 역사가 있었다면 이들 부부는 아직 함께하고 있었을까? 시대가 역사가 한 개인의 삶과 사랑과 가정을 깨기도 하고 붙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시련과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사랑이란 어차피 있어봐야 별 볼일 없을 거란 생각을 하다가도 왜 남들 편히 하는 것들인데 누군가의 사랑만 무수한 시련 앞에서 시험받고 훈련 되어져야 하는 것인가 의문도 들고. 


3.     오늘 만난 이혼남 


간만에 그를 만났다. 부부끼리 가깝게 지내다가 막상 한 부부가 깨지니 그 둘 중 누구를 친구 삼아야 하는지 누구를 버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혼은 순전히 그녀 탓이었다. 몇 년을 참고 견디던 그가 마침내 그녀의 요구대로 이혼을 따랐을 때, 그녀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 날 내 앞에서 생각지도 않은 눈물을 쏟으며 그녀는 통곡했다. “난 이혼과 동시에 그와 사랑에 빠졌어. 함께 있을 땐 이만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정말 황당했다. ‘아!!!.. 머리 아파. 지금 와서 뭔 소리야. 이젠 너무 늦었잖아…….’ 

그녀는 이혼 뒤에 본격적으로 힘들어했다. 그들의 생활 반경이나 만나는 사람들은 이혼 전이나 후나 거의 유사했다. 이혼을 했다고 둘이 알던 모든 친구들을 끊고 새로 만들 수도 없고 단골 레스토랑을 다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녀와 시내의 베트남 레스토랑에 늦은 아침을 먹으러 갔었다. 

나 : 음. 너무 맛있는데.. 이 맛집은 어떻게 찾았어? 

그녀 : 전남편과 오던 곳이야. 저녁엔 그도 와서 먹겠지.

나 : 뭐? 근데 여길 온 거야? 

그녀 : 그럼, 맛있는데 어떻게 해? 그리고 그 사람 지금은 안 와. 일하는 시간이잖아. 

나 : &#$%?? 

아직도 서로를 너무 잘 아는 이들은 (실은 이혼 뒤에 더욱 서로를 이해하는) 둘 다 새로운 애인이 생겼는데도 한 번씩 만나 밥도 먹고 얘기도 하며 지낸다. 그 사실을 새 애인들도 알고 있다. 매우 쿨 하다고? 요즘 세대 같다고? 글쎄다. 그들은 둘 다 풍파 맞은 어두운 얼굴로 산다. 


그 이혼남을 오늘 잠깐 만날 일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이었고 우리는 너무 반가워서 포옹을 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마주 앉았다. 근데 그러고 나서 얘깃거리가 마땅치 않은 거였다. 이 얘기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고 저 얘기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고. 나도 머리를 굴리고 그도 머리를 굴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도 알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면서도 화제는 딴 데로 돌리다가 중간중간 얼굴이 슬퍼진다. 우리는 자리를 일어서며 또 따뜻하게 포옹을 했다. 

“그래, 우리 또 만나자. 연락해.” 


내가 그의 새 애인을 만날 기회가 있을까? 그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을까? 가는 게 바람직한가? 우리는 예전처럼 실없는 소리하며 낄낄 웃는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변했다. 


이혼은 참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게 한다. 국적이 달라도 인종이 달라도 세대가 달라도 이혼은 쉽지 않고 복잡하고 불편하고 힘들고 아프다. 그래서인지 저 위의 부부처럼 25년이나 혹은 그 이상을 잘 견디고 밋밋하게 산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새삼 존경스럽기도 하다. 25주년이 오기 전에 아니 한 해 한 해 라도 잘 버텼다면 그날을 기념하고 정말로 서로를 축하해야 하지는 않을까 싶다.  (2011/08/02)


요즘 한국에도 이혼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들이 인기인 듯 해 예전에 썼던 이혼 관련 글을 찾아봤다. 그 새 세월은 흘러 나도 결혼 20주년을 훌쩍 넘겼는데, 이를 기념해 뭘 했나 생각해보니 배를 타고 남태평양의 따뜻한 섬나라들을 여행했다. 이 글을 떠올렸거나 여러해 동안 계획했던 것이 아닌데, 예전에 가볍게 썼던 글대로 실행을 했다는 사실에 잠시 놀랐고 그럭저럭 평안하게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도 생긴다.

당시 화려하게 기념식을 치른 커플은 지금은 은퇴하고 손자를 보고 여행을 다니며 잘 산다. 홍콩은 한동안의 평화로운 시기를 지나 다시 격랑에 시달리기도 했다. 많은 가정들이 평화를 찾아 이민을 고민하며 또다시 시련을 겪는거다. 맘고생이 심했던 이혼남은 재혼 해 자식을 둘이나 두고 잘 사는 듯 했는데 40대 초반이었던 어느 날 건강 문제로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알려주는 자도 없고 페이스북에서 뒤늦게 보고 놀랐었다. 새 부인과는 안면이 없어 위로의 말도 전하지 못했다. 그 날 어색하게 만난게 마지막이었던 거다. 산다는 건 참 부질없기도 하다.

집 근처 세인트 앤드류 바닷가
석양이 아름다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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