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이가 왜 나와..
집에서 10분쯤 걸으면 만나게 되는 No. 16 바다. 주변의 유명한 바다들에 비해 덜 알려져서인지 늘 조용한데 이 날도 어김없이 바다는 비어 있었다.
며칠 전 옆동네에서 길가다 우연히 만난 중국 여인과 함께 산책을 오게 됐다. 아시안이 드문 동네이다 보니 잠시 길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시간 나면 차나 한잔 하자고 연락처를 교환한 터였다. 이사온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혼자 살아 심심해서인지 성격이 원래 외향적인지 내 또래의 그녀는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다.
젊을 때 밀라노에서 10년간 엔지니어 공부를 했고 남편은 상하이에서 사업을 하고 중학생 딸은 또 바다 반대쪽 동네의 비싼 사립학교 기숙사에 머물고 있단다. 한때 한국에서 기러기 엄마들이 유행이었던 것처럼 부유한 중국인들도 투자이민을 오고 자녀교육에 열심인데 이들은 이국에 나와서도 자녀와 함께 살기보다 기숙사에 보내 학교에서 완전 전인 교육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같다. (다 그런건 아니겠지만 그런 사례를 좀 봤다.)
자녀와 거리두기랄까.. 좋은 부모가 되기 어렵다는 겸손 혹은 자기 비하인가.... 돈은 얼마든지 낼 테니 우리 애 좀 완전히 잘 맡아 주십시오... 란 느낌이다. 그리고는 자기들은 돈 버는 일에 몰입한다. 형편이 빠듯해서 그렇다면 안타까운 마음도 들고 이해가 되겠는데, 여유가 있음에도 부를 쌓고 집을 여러 채 사는 일에 주력하며 가족과 떨어져 사는 이들을 보면 좀 의아하기도 하다. 도대체 얼마나 산다고 저러는 걸까?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어떤 미래를 기대하며 지금을 희생하는 걸까?
바닷물이 많이 빠져있었다. 물속에 잠겨있던 밑바닥이 드러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바닷물 속 웅덩이 (Rock Pool)는 이름 모를 해초들이 가득하고 미처 바다로 따라 나가지 못한 작은 물고기들이 갇혀 헤엄을 치기도 한다. 돌 위에 따닥따닥 달라붙은 소라와 석화들도 아름답다. 저 큰 바다를 축소해 놓은 듯한 미니 수족관이 흥미롭다.
우리는 해초들로 미끌대는 바위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바다를 감탄하고 청량한 날씨를 즐겼다.
이런 바위 벽도 나타났다. 밀물때면 물에 잠겨 코빼기만 살짝 보이던 곳인데, 이리도 웅장하고 독특한 모습이었다니..
난 잠시 심청을 생각했다. 인당수에 몸을 던져 바닷속에 빠진 심청이 자라의 등을 타고 용왕이 사는 용궁을 가지 않는가. 그 용궁은 아마도 이런 모습이었을 것 같다. 왜 용왕일까? 바닷물에 거칠게 휩쓸린 바위들은 종종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제주도에도 호주의 No 16. 바다에도 또 세상의 어떤 다른 바닷가에도 용머리로 불리는 바위가 흔하게 있다. 작자미상으로 오랜 세월 구전된 이야기 속엔 허구와 공상에만 그치지 않는, 뭔가 검증되어 의심하기 어려운 현실 속의 오브제가 있기에 대대로 생명력이 유지되는 거란 생각을 해봤다.^^
나의 동행인 중국 여인은 낯선 여인에게 또 말을 걸고 사진도 찍어준다. 좀 멀찍이 서서 생각한다. 이 여인과 이웃이 되어볼까 말까. 이상한 사람은 아닌 듯한데, 한 번씩 만나 차 한잔 하며 산책을 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한데 한편으론 시간을 따로 내고 새로운 사람을 굳이 알아가야 한다는 과정이 기대되기보다는 좀 피곤하다. 저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문제이다. 나이를 먹어가나 보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저 큰 바위벽에 큰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다. 한 때 연결되어 있던 하나의 바위벽이 두 동강이 나 끊어진 다리처럼 보이는 것이기도 하리라. 육지가 깎여나가 다리가 되었다가 다시 또 섬으로 떨어져 나갔다가 깎이고 깎여 바위가 되고 모래가 된다. 도대체 세월이 얼마나 흐른 것일까?
물 빠진 바위를 걸으며 이 생각 저생각 하다보니 어느새 바닷물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바위벽 뒤는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등을 돌려 바라본 하늘은 어찌나 푸르고 맑던지..
밀물 때면 물에 잠기는 바닷속인데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서인지 길이 나있다.
산책을 잘하고 기분 좋게 땀을 흘리면서도 사사로운 잡생각으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는 나는 뭔가..
대자연 앞에 인간사란 왜 이리 자잘하고 하찮기만 한 것인지 모르겠다.
No. 16 바다는 오늘도 아름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