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90을 넘긴 T는 파트너 F와 태즈메이니아섬 (한국으로 치자면 제주도쯤 될 것이다.) 패키지여행에 나섰다가 그곳에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한밤중 숙소의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었고 F는 아침이 되어서야 T가 침대 옆자리에 없음을 알았단다. 안으로 잠긴 화장실 문을 호텔 직원과 겨우 열고 들어갔던 일, 구급차에 실려간 T가 병원에서 다시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사망에 이르렀는데 검사 중 코로나에 감염됐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어 연차의 충격을 받았던 경황을 F는 담담히 말했다.
여행지에서 배우자가 사망했고, 코로나로 격리까지 해야 했던 상황이라 F는 곧 두 개의 트렁크를 챙겨 홀로 비행기를 타고 귀가했다. 가족과 주변인들은 황망한 죽음에 모두 놀랐지만 곧 이성을 차렸다. 건강하게 지내다가 좋아하던 여행지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즐겁게 살다 가셨으니 호상이라는 것이었다.
내 생각도 그랬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몇 가지 건강 문제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순회하며 검진하고 좋지 않은 결과를 듣고 회복이 더딘 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보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T의 장례식에서 했던 생각들은 이랬다.
교회에서 장례식을 마치고 추모객들이 길 건너편 묘지로 함께 걸어 이동했다.
1. 장례 날짜는 유족 맘대로.
다니던 동네의 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T의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이미 사고와 지병으로 사망했다. 몇 해 전 60대의 아들을 암으로 먼저 보내고 슬퍼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장수하는 노인들은 종종 장수하지 못하는 노년의 자녀들을 앞세우기도 한다. 장남은 퀸즐랜드 북부에서 트레일러(캠핑카)를 몰고 5일에 걸쳐 내려오는 방식을 택했다. 비행기를 타면 3-4 시간 걸릴터인데 큰 차를 끌고 장거리 운전을 하며 슬슬 내려오겠다는 여유가 낯설었다.
호주에서는 유족들이 편의에 맞게 장례 날짜를 정하는 것도 같다. 보통은 사망 이후 1-2주 내로 잡는다. 하지만 어떤 지인은 장기 해외여행(한 달 이상) 중 요양원에 머물던 노모의 부음을 들었는데 동생들이 오히려 '간만에 간 여행이니 다 마치고 오라' 했다며 서둘러 귀국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엄마 옆에서 긴 간병을 하며 묵묵히 지내오던 딸이었고 모처럼 떠난 휴가였기 때문이다. 지인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가족들과 장례 절차를 온라인으로 논의하면서도 예정대로 여행을 조용히 마쳤다. 그리고 그녀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온 가족은 그제야 따뜻한 장례를 느긋하게 치렀다.
2. 추도사에 관하여
호주 장례식엔 추도사(Eulogy)가 꼭 있다. 유족들 중 누군가가 나와 고인의 삶을 정리하거나 지인들이 고인과의 추억을 나누는데,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고인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라 귀 기울여 듣게 된다.
경력이나 사회적 성공을 열거하기보다는 남들은 잘 모르는 그들만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로 나누는 편이다. 가령, 머리가 하얀 중년의 아들이 아버지를 회고하며 '어린 시절 금요일 저녁이면 아빠와 식탁에 마주 앉아 카드놀이를 했는데 그 추억이 지금 너무도 사무친다.'고 말하며 목이 메면 듣는 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눈물짓는다. 10명이 넘는 손자손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할머니께 바치는 시를 한 줄씩 읊으며 울먹이기도 하고 코미디언을 능가하는 유족이 배꼽 잡는 유머로 고인을 소회해 큰 소리로 다 같이 웃기도 한다. '울 아부지 청춘 때 구닥다리 오토바이 끌고 호주 대륙 일주한 미친 얘기, 여러분도 여러 번 들었지요? 완전 또라이, 하하하.. 힘든 일 많아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던 강한 분이었는데 이젠.. 흑흑흑..."
T는 꼼꼼하고 철저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장례 절차는 물론 추도사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다. 유산 목록도 몇 번씩 업데이트하며 공증을 해놓는 분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이 없다. 자유분방한 아들은 추도사가 적힌 종이를 며칠 전에 건네받고도 깜빡 잊어 장례식에 가져오지 않았다. 그는 몇 가지 얘기를 두서없이 하며, '엄마는 핸드백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옷장을 여니 수십 개가 끝도 없이 쏟아지더라..'며 얼렁뚱땅 넘어갔다. 하아!!! T의 삶이 이렇게 정리가 되다니.
곧이어 단상에 오른 동성애자 손자는 '내가 18살 되었을 때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카드와 20불을 보내주셨지. 햄버거도 사 먹고 좋았어. 그런데 그 후로 20년이 넘도록 크리스마스 때마다 20불씩 보내주신다.'며 웃었다. T를 잘 아는 지인들은 함께 웃지 못했다. 할머니의 90 인생을 너무 가볍게 마감해 버린 것이다.
내가 알던 T는 훤칠한 키와 늘씬한 외모가 돋보이는 금발(말년엔 백발이 되었지만)의 미녀였다. 수영장이 딸린 전망 좋은 집에서 살며 해마다 크루즈 세계여행을 다니는 세련된 분이었는데 그럼에도 누구도 하대하지 않고 친구처럼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매너가 좋은 분이었다. 종종 미용실에 가서 적지 않은 돈을 쓰며 머리를 다듬는 것도 좋아했다. 물론 고집이 좀 세고 수집벽이 있으며 엉뚱하게 절약을 하는 면도 있었다.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가장 저렴한 브랜드의 식료품만 사고 노인 할인을 해주는 맥도널드에서만 커피를 마셨다. 그래도 빈국의 기아 아동을 위해 꾸준히 기부를 하는 분이었다. 근 10년 간 매주 교회에서 만난 T는 그런 모습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고인과 어떻게든 엮여있지만 그의 전 인생을 파악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알지 못하는 삶의 구간과 영역이 있다. 우리는 모두 T에 관한 몇 개의 퍼즐 조각을 들고 장례식에 왔고 서로의 조각을 조금씩 꿰어보는 것이다. 맞아 들어가기도 어긋나기도 하는 그녀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며 각자의 마음대로 T가 누구인지 해석하는 건 아닐까?
누군가의 장례식에선 퍼즐 조각들이 하나씩 모여 한 장의 멋진 그림으로 완성된다.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의 삶이 각자가 가져온 조각들과 함께 잘 맞물려 완성되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장례식에선 들고 온 조각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도 한다. 큰 그림과 맞아 들어가지 않거나 묘한 부조화로 어찌할 바를 몰라 미완의 그림을 뒤로 한 채 찜찜함으로 장례식을 나서기도 한다. 생각해 보니 T는 큰아들 이야기를 잘하지 않았다. 마음이 잘 맞거나 건강하지 않았던 두 아들 이야기를 늘 했던 것과는 달리. 어쩌면 죽음은, 장례식은 삶을 꼭 닮았는지도 모른다. 삶이 잘 짜이면 장례식의 구성도 잘 짜여들어가고 풀리지 않은 삶의 어긋난 부분들은 마지막까지도 좀 꼬여 있는 듯하다.
나는 나의 추도사에 어떤 사람으로 등장을 할까?
모든 장례를 마치고 T의 어린 증손자는 관 위에 놓여 있던 장미를 추모객들에게 한 송이씩 나누어 주었다. 식탁 위의 분홍 장미를 볼 때마다 꼿꼿하고 우아했던 T를 잠시 떠올리며 하늘에서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집에 돌아와 소렌토 뒷바다로 산책을 나갔다. 바닷가 절벽에 자리 잡은 뷰 좋은 카페에서 누군가가 결혼을 한다. 산 사람은 또 산 사람대로 축복받으며 인생의 새 장을 열어간다. 이래저래 아름다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