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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말라위, 선물 받는 자세와 절차가 눈물겨워.

사람 사는 이야기 3

by 몽기

어느 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 안의 정원을 남편과 산책하던 중이었다. 크지는 않지만 잘 손질된 나무와 잔디가 단정했고 종종 원숭이들이 나타나 나무와 지붕 사이를 뛰어놀기도 했으며 미로처럼 만들어진 산책로가 단조롭지 않아 천천히 몇 바퀴씩 돌아도 지루하지 않은 정원이었다. 바깥으로 나가자면 치안이며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마음 놓고 가볍게 거닐기도 쉽지 않은 터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숙소 안에 이런 조용한 정원이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정원에서 가지를 치던 청년 P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당신들이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나눠준다고 들었어요. 저도 정말 읽고 싶은데 한 권만 얻을 수 있을까요?' 간절한 눈빛이었다.

멜번의 여러 교회와 단체로부터 헌금을 받아 치추와어 번역본을 수천 권 마련했음에도 말라위 교회마다 수요가 넘쳤고 일일이 다 줄 수가 없어 들고 나는 권 수를 매번 세고 있었다. 또 성경책 가격이 일반인들이 사기엔 매우 비싼 금액이었으므로 암시장에서 거래될 우려도 있었기에 받는 신도들을 정확히 확인해 오던 참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수중에 남은 성경책은 한 권도 없었다.

호텔 객실은 엉망이어도 정원은 손질이 잘 되어 있다. 건물 보수는 돈이 들어 못하고 정원은 가위만으로도 할 수 있어서 그런건가?

지금은 줄 수 없지만 팀 리더에게 확인은 해보겠다며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우선은 그의 관심이 진짜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교회와 성경 이야기를 좀 해보았다. 그는 두 눈을 반짝이며 성경의 인물들을 줄줄이 꽸다. 눈빛은 진지했고 말도 조리 있게 박식하게 잘했다. 대부분의 말라위 교인들이 그런 것처럼 한 번도 성경을 직접 읽어본 적이 없다는데, 주일날 설교만 듣고도 그 많은 내용을 다 기억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꾀죄죄한 외모와는 달리 예의도 바르고 반듯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정원 한구석에 선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키도 작고 깡마른 P는 28살이었다. 그의 삶은 고달팠다. 가난하고 배운 건 없고 취업을 해서 몇 푼 벌어도 빚이 늘어간다는 그는 신앙으로 버티고 섰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하는 듯했다. 어렵게 돈 얘기를 꺼낸 그에게 '빚이 얼마인가?' 물었다. 대답을 듣고 잘못 들었나 놀라 몇 번씩 계산을 다시 해봤다. 만원 안쪽의 돈이었다. 정원사로 일해 몇만 원 월급 받는 그에게는 늘어가는 빚이 부담이라지만 그 액수가 너무 적어 황당하고 슬펐다. 한 청춘이 고작 그 돈에 짓눌려 절망하고 숨 가빠하며 눈가에 눈물을 맺고 내 앞에 서 있는가... 우리는 기도를 하고 헤어졌다.


회의실로 돌아와 리더와 사정을 이야기하다가 다행히 몇 권 남은 성경책을 받을 수 있었다. 격려의 말 몇 마디를 적고 빚을 청산할 현금도 조금 챙겼다. 트렁크 안에서 몇 가지 옷가지와 선물을 챙겨 정원 구석에서 빵쪼가리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 그를 불렀다. 성경책을 건네자 그의 얼굴은 환희로 가득 찼고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내 삶에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다니' 정도의 깊은 감사를 전해왔다. 이 청년의 삶이 변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하며 돌아섰다.


잠시 뒤, 그 청년이 방문을 두드렸다. 선물이 너무 값져 객실을 턴 도둑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고 규율상 매니저에게 검사를 받아야 하니 목록을 종이에 적어 선물임을 인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내놓기도 민망한 쓰던 물건 몇 개 챙겼던 건데..

'티셔프 한 장, 반바지 하나, 양말 두 짝, 볼펜 한 자루, 모기약, 오트밀 반봉지....' 비닐봉지에 담아 건네었던 초라한 물건들을 다시 뒤적여 하나씩 적자니 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 나라에 가득한 이 지독한 빈곤을 어떻게 밀어낼 수 있단 말인가... P는 과연 무슨 수로 이 고단한 삶을 헤쳐나간단 말인가?

뮬란지 산 근처의 숙소. 견고한 담장, 잘 손질된 정원, 객실도 이전보다 나았다.
그러나 종종 단수가 되어, 유사시엔 펌프물을 써야 한다. 우물가로 가지 않고 담장안에 펌프가 있는것 자체가 호사이지만;;

말라위를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그동안 트렁크의 짐들을 만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음에도 마지막 날까지 쓰던 것들이 또 한 보따리였다. 파자마, 수건, 슬리퍼, 비상약 등등의 잡동사니들. 그동안 방을 청소하고 세탁물을 관리해 주던 어린 처자 S를 조용히 불러 필요하면 쓰라고 건네주었다. S는 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뜸과 동시에 다리가 풀린 듯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을 떨며 내 발밑에서 흐느껴 울었다. 예상을 뛰어넘은 격한 방응에 놀라 얼른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요. 무릎 꿇을 일 아니야. 울지 말아요. 별거 아닌데 왜 이래..' 눈물을 훔치며 일어서면서도 고마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여기 봉지 안에 리스트도 다 적어 놨으니까, 매니저한테 보여줘요' S가 얼른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목록을 적은 쪽지를 내보이며 이성적으로 대처했다.

사람들은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교회에 와서 한가하게 수다떨고 평화롭게 웃는 듯 했다. 고달픈 일상을 잠시 접고.

말라위 여성들은 종종 무릎을 꿇었다. 상대를 존중하는 예절이고 문화일 수도 있겠지만, 집안에서 남편에게도 무릎을 꿇고 얘기하는 모습을 몇 번 보고 조선 시대 같다고 생각했었다. 후진국일수록 모두가 고생을 하는 중에도 특히나 여성과 아이들이 더 낮은 지위로 천대를 받는다.

S가 무릎을 꿇는 게 싫어서 당당하라고 서둘러 일으켜 세웠는데, 그냥 좀 울게 내버려 둘걸 그랬나 생각도 든다.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행운을 잡은 듯 감격하는 그가 그 감정에 좀 취하고 즐기도록 놔두지 못했다는 미안함도 뒤늦게 든다.



아프리카 말라위, 낯선 대륙 이상한 나라에서 별별 일을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알아가고 배워가고 같이 웃고 울며 참으로 진한 시간들을 보냈다. 까맣게 잊었던 지난 시간들이 불현듯 되살아 나기도 했고 내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안락한 지에 대한 감사도 늘었고, 지구 한구석의 다른 인류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놀랄 만큼 부풀었다.


이 여행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좀 흐른 뒤 하는 것이 좋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여행 이후로 아프리카가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는 이제 이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의식 있게 바라보고 목소리를 내고 필요한 행동을 하는 옹호자(Advocator)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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