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물개를 만난 이야기
포틀랜드는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다. 200여년 전 신대륙으로 이주하던 유럽인들이 첫발을 내딛던 포틀랜드 항구가 있어서 그 주변으로 역사적인 건물들도 여럿 들어서 있고 한때는 왕성한 경제활동이 있었던 듯도 한데, 지금은 휴가철임에도 바닷가 주변이 적막함을 느낄 정도였다. 여름답지 않게 날씨가 선선했던 한 주였고 이곳으로 오는 길목의 주변 마을들이 큰 산불로 연일 뉴스에 오르내려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주일날 동네 교회에 갔다가 아일랜드 청년, 스코틀랜드 처자 커플과 예배 후 작은 카페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들에게 핫플레이스를 물었더니 브릿지워터만(Cape Bridgewater) 산책길을 추천했다.
'Great South West Walk'이란 250km에 달하는 바닷가 트레일의 일부 구간이다. 간단한 침구와 식량을 배낭에 챙겨 길 위에서 먹고자며 2주일간 전 코스를 걷는 이들도 이후 여럿 만났다. 스페인의 산티에고처럼 세계인이 찾는 유명 바닷가 트레일 코스다.
바닷가 벼랑 끝으로 난 좁은 길을 걷는 동안 한쪽으로는 한없이 펼쳐지는 브리지 워터 바다 뷰를, 다른 한쪽으로는 양 떼가 모여있는 농장이나 캥거루 떼가 뛰노는 목초 뷰를 원 없이 누릴 수 있다.
길을 걸으며 했던 생각 몇가지는 이랬다.
26살 아일랜드 청년은 17살에 고교를 중퇴하고 집을 떠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일하다 호주까지 왔단다. 농장에서 양털을 깎는 쉬어러 일을 몇 년째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호주에서 계속 살고 싶어 했다. 아일랜드는 시간당 최저 임금이 20불 안팎인 데다 (호주는 25불) 집값은 호주보다 더 비싸 방세 내기도 빠듯한 생활이란다.
있는 집 아아들은 그나마 버티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일을 찾아 외국을 나간다며 그래도 호주가 살기가 낫다고 한다.
쉬어러는 (아랫글 참고) 수입이 좋은 만큼 노동 강도가 세기로 악명 높은 직업이다. 많은 쉬어러들이 한 시즌 바짝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설렁설렁 사는데, 자신은 빅토리아주에서 한 시즌이 끝나면 다른 주로 옮겨 바로 일을 이어간다며 다음 주 시드니로 떠날 예정이라 했다. 외식비를 줄이기 위해 장을 봐서 요리를 직접 해 먹고 스스로 건강도 잘 챙기며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자신 있게 대화를 하는 등 나이에 비해 야무졌고 여러 경험이 많아서인지 성숙해 보였다.
스코틀랜드 처자는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이었는데 동물병원 간호사로 일하며 여행을 다니다 남친을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라 했다.
쉬어링을 알고 싶다면,
https://brunch.co.kr/@dreamdangee/74
20여 년 전 워킹할러데이로 와서 처음 만났던 유럽의 청년들은 참으로 여유가 있고 달라 보였는데, 내가 나이를 먹어서인지 호주에 살아서 그런건지 한국인들이 경제 수준이 나아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들도 참으로 빠듯하게 열심히 사는구나란 인상을 받았다.
또 아들의 친구들을 봐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고졸이거나 심지어는 고1 정도를 마치고 목수나 배관, 전기 등 기술을 배워 자기 살길을 찾아가는 것도 이제는 당연하게 긍정적으로 보게도 되었다. 그들은 문제아도 아니고 학업에 실패한 낙오자들도 아닌, 가족과 사회의 따뜻한 지지를 받으며 적성을 찾아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청년들일 뿐이다. 게다가 기술자로 일해도 대졸보다 수입이 비슷하거나 더 많은 경우도 흔하니 열등감이나 좌절을 느낄 이유도 전혀 없다. 사회 시스템이 빚어낸 직업을 바라보는 편견도 AI 시대를 맞아 막을 내리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5킬로쯤 걸었더니 이번엔 물개 서식지가 나타났다. 아침부터 먼바다로 나가 맛난 물고기를 잡아먹고 배를 채운 물개들이 오후가 되면 이곳 바위에 올라와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낮잠을 잔단다. 여기저기 바위틈에 널브러져 부른 배를 쓸며 자는 모습도 우습고 작은 웅덩이에 들어가 헤엄치며 노는 모습도 귀여웠다. 이렇게 자유롭고 천진하게 노는 물개들을 보자니 그동안 수족관에서나 봐왔던 물개들이 떠올랐다. 왠지 미안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물개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라는 운동을 하는 것이 좋을지, 그래도 많은 이들이 수족관에서라도 이들을 바라보고 생태를 이해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 나을지 같은 뜬금없는 사색들도 잠시 해봤다.
여름해가 길다지만 이쯤에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렇게 왕복 10킬로를 지루한 줄 모르고 걸었고 이 트레일에 매료되어 결국은 일주일 내내 다른 구간을 이어가며 약 50 킬로를 걸었다.
전혀 계획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시간을 채운 트레일 걷기는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모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