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참 알파벳을 배우는 아들을 보면서 한국과 호주의 교육법이 이렇게 다르구나 생각했다.
생각 1.
호주 엄마들은 초등학교에 가도록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이들이 제 이름 정도 쓸 줄 알면 다행이다. 참으로 느긋한 엄마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오리엔테이션에서 받아온 자료 (Your child’s first year at school, 31p)를 보니 ‘아이들에게 A-Z까지 연달아 한꺼번에 가르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글자 사이의 관계와 발음, 단어 안에서 어떻게 쓰이는 지를 이야기하며 한 번에 몇 개씩 글자를 배워야 한단다. 학습내용을 미리 알려 김을 빼지 말고 아이들이 깊이 있게 배우는 과정을 즐기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한국에서 학원을 중심으로 선행학습이 주를 이루는 모습과는 상반되는데 그 차이를 이야기로 엮어보자면 대략 이럴 수 있겠다.
아이 : 엄마, 학교에서 다음 주에 *** 영화를 본데요.
호주 엄마 : 재미있겠다. 팝콘도 사 먹고 친구들과 좋은 시간 보내고 와라.
한국 엄마 : 그래? 내가 마침 그 영화를 봤으니 해줄 말이 있다. 그 영화의 범인은 D다. 사람들은 B냐 C냐를 놓고 궁리를 하는데 헷갈리면 안 된다. 외워라. 그리고 A가 영화 중간에 사라지는데 죽었다고 생각하면 안 돼. 마지막 장면에서 살아 돌아온다니까. 빨간색으로 밑줄 그어.
내용을 다 알아버린 한국 아이는 영화가 재미없고 심심하다. B나 C를 놓고 범인을 찾는 친구들을 멍청하다고 여기며 답답하게 바라본다. A는 죽지 않았다고 말해 주려다가 입을 다문다. 이거 시험에 나올 수 있으니까 나만 알고 있어야지.
호주 아이는 B와 C를 놓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시간을 다 보낸다. 마지막에 D가 범인임을 알고 깜짝 놀라 정신을 못 차린다. 무엇을 놓쳤던 건지 다시 생각해 본다. A의 재등장으로 뒤통수를 맞지만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영화가 너무 재미있다고 느낀다. 뭐 대략 이런 교육법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아들은 알파벳을 한 자씩 배우는 책을 스스로 골라 한 권씩 빌려오는데 첫 책은 ‘D’였다. 용이나 공룡을 좋아하는 아들이니 Dragon이나 Dinosaur라는 단어에 먼저 눈이 갔을 것이다. D로 시작하는 단어가 들어간 짧은 문장이 5-6번 반복되는 얇은 그림책이었다. 아이들은 한 교실에서 제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알파벳부터 공부하기 시작한다.
한자씩 배우며 그 모양이나 음, 단어 안에서 문장 안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궁리한다. b와 d는 왜 배가 다른 방향으로 나왔는지 p와 q는 왜 머리를 맞대고 있는지 별별 생각이 다 지나간다. 글자를 늘어놓고 아들이 하는 고민과 혼돈과 사색을 들여다보면서 알파벳이라는 게 그냥 간단하게 외우고 말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알파벳 하나를 놓고 응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고 노래를 하고 몸으로 그 글자를 만들어 춤을 추기도 하고, 과자로 접시에 알파벳 배열도 하다가 어느 날은 그야말로 빨래집게나 별별 사물 안에서 알파벳을 찾아내고 감탄하며, 그렇게 한 자 한 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배우면 배울수록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이리라. 이제 아들은 길을 걷다가도 온 세상의 D는 다 찾아낸다.
아.. 내가 알파벳을 미리 안 가르치기를 잘했다. 조급하게 이 과정을 다 건너뛰도록 했다면 아이는 그 긴긴 시간 교실에서 얼마나 따분했겠는가. 얼마나 많은 재미난 생각과 배움의 시간을 놓쳤겠는가.
생각 2.
어느 날 서점에서 알파벳 관련 교육 책들을 뒤적이다가 A for apple, B for banana 하는 식으로 단어와 연관 지어 알파벳을 가르치는 책을 보았다.
그런데 D for divorce(이혼)라는 페이지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이혼이 워낙 흔한 일이고 아이들도 본의 아니게 이런 상황에 자주 부닥치다 보니 어린 나이지만 이런 단어와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는 취지인 듯했다. 아이들은 자신과 연관된 상황들을 이야기를 통해서 이해하고 배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실제 삶과 연관된 이야기들을 다룬 책들이 많은데, 예를 들면 이빨이 빠질 즈음 읽는 책들이 그렇다. 이빨이 빠지는 과정과 원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이빨 요정이 등장해서 새 이빨로 갈아준다는 전래 동화책도 있는데 아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 때 도움이 된다. 아이들은 이가 빠져도 울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생기는 일이 내게도 왔다는 것, 새 이빨이 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키우던 애완동물이 죽었을 때 읽는 책도 있다.
복잡하고 두렵지만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 책으로 읽어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혼이란 단어도 이렇게 편안하게 아이들 책에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이들은 아이들 세상에서만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에 아이들 눈높이에서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2012/03/06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