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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Sep 12. 2021

호주 시골, 앞마당의 '체리'를 땄다.

체리 예찬 백일장

스킵튼으로 이사 온 첫날, 무더운 날씨에 긴 운전으로 지쳐있던 우리는 짐 풀기가 겁이나 마당부터 둘러보았었다. 나무 위에 잔뜩 빨간 열매가 열려 있었다. 저게 뭐지?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었다가 너무 놀라 서로 마주 보고 외쳤다.


‘체리다! 이게 다 체리다!’ 


마당에 체리 나무가 여기저기 5-6 그루는 되는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어로는 ‘체리 플럼’ 이라고도 하고 체리와 자두의 중간쯤 되는 과일인데, 나무마다 종자가 조금씩 달라 어떤 나무는 빨간 체리를 어떤 나무는 노리끼리한 체리를 달고 있었다. 크기도 조금씩 달랐지만 모든 열매들이 엄청 달고 무지 맛있었다.


그때부터 해마다 12월이 되면 체리를 먹고 친구들을 불러 체리 따기 행사도 열고 잼이나 와인을 담가 나누기도 하며 많은 기쁨을 나누었던 것 같다. 그 때 적었던 일상의 글들을 모아봤다. 


체리


아침 한나절 아이와 체리 따다. 

체리를 따서 

체리를 먹고 

체리 비를 맞으며 

체리를 즈려 밟고 

또 

체리를 따다. 

즐거운 체리 축제.

어느 해인가 잔뜩 수확한 체리를 아기 욕조에 가득 채워 씻었다.

또다시 체리 시즌이 다가왔다.


체리 2


가지가 휘어지도록 실한 열매들.

그 그늘 아래서 익어 가는 체리를 지켜보며 한동안 즐거웠다.

그래, 너는 내게 바라보는 즐거움도 주었구나.  


나무 가지 사이로 뽀얗게 쏟아지던 햇살은

따뜻하거나 뜨겁거나 혹은 구름 뒤에 숨어서

체리를 키우고 익혀놓았다.

이토록 탱탱하고 빨갛게..   


동네 아이들을 불렀다.

봉지 하나씩 들고 체리 따는 시골 아이들.   

손도 바쁘고   

입은 더 바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가득하다.   

너희들도 행복하구나.   

체리는 달콤하고

이 시간도 달콤하다.   



체리 3


우리 이걸로 무얼 할까?   

터질 듯 탱탱한 붉은 그대들.  

집에 있는 병 병마다 가득 

체리를 설탕에 재운다. 


 와인인가 주스인가, 

핏빛처럼 검붉은

진한 달콤함에 빠져  

쉽게도 병을 비운다.



체리 잼을 만들며 


체리 한 들통 끓여 잼을 만들다. 

과즙이 넘쳐 주변이 지저분해졌을 때

작은 씨를 성긴 조리로 걸러 일일이 발라낼 때

한참을 서서 졸기를 기다리며 주걱을 휘저을 때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짜증 나다.   


슬로우 푸드(Slow Food)에 대해 생각해 봤다. 

신선한 재료를 (Good Produce)

전통 조리법으로 요리해 (age-old skills)

최고의 맛을 끌어낸다는 (Fine Flavours)... 

그래, 짧은 인생.. 천천히 살아보자..

체리를 뭉근히 졸이며

내 인성도 조리하다.    


세 대야 수확해서 한 들통 끓였는데 

달랑 작은 8병. 

이웃, 친구들과 기쁨으로 나누다.  

비교할 수 없는 초절정의 맛.

아! 정말 이 잼을 내가 만들었던가.


그래서

또 한 들통 체리를 끓이다. 

과즙이 넘쳐 주변이 또 지저분해졌을 때

작은 씨를 성긴 조리로 걸러 일일이 또 발라낼 때

한참을 서서 졸기를 기다리며 주걱을 또 휘저을 때

내가 왜 이 짓을 또 하고 있나 다시 짜증 나다. 

내 인성도 또다시 조리하다.   


앞마당 체리가 너무 빨갛게 잘 익어서

즙이 많고 무지 달콤해서..

나는 또 체리나무 아래서 고민을 한다.

한 들통 더 끓여야 하나...;;     



체리나무 아래서


 빨갛게 익은 체리 나무 아래서 

그 과일 맛있게  따먹다가 

여름 햇살 피해 그 그늘 시원하게 즐기다가

그 나무 바라보며 그림 그린다. 


볕 좋은 어느 오후,

 나무 위의 새소리, 사각대는 붓소리

우리 사이로

적막이 흐르고

평화가 흐르고

세월이 흐른다.

체리는 익고 아이는 자란다.


(2010/01/21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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