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일기 09. 온전히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 감사

by 책계일주


문득 오늘은 저녁이 있는 삶에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퇴근해서 집에 오자마자 빨래를 돌려놓고, 거실에 아이들의 흔적을 정리하고, 주방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쌀을 씻어 담가놓았다. 아침에 못다 한 설거지를 하고, 기름 살짝 두른 팬에 두부를 부치고, 냉동실에 있던 고등어를 해동해서 다른 팬에 구워냈다. 4분의 1로 잘라 보관했던 양배추는 씻어 냄비에 물을 담고 살짝 찐다. 납작한 냄비에 들기름과 고춧가루, 국간장을 넣고 보글보글 끓을 때까지 저은 후 순두부와 새우젓, 양파, 호박, 버섯, 마늘, 대파 넣고 마지막에 계란을 넣고 참치 액젓 한 숟갈로 맛을 냈다. 겨울이는 역시 엄마는 순두부찌개의 달인이라며 엄지 척을 해줬다. 겨울이는 엄마의 요리 비법이 참치 액젓이라는 비밀을 아직 모르고 있다.



가을이는 지난주에 독감에 걸려서 학교에 며칠 못 가는 바람에 수행평가가 밀려서 걱정이라고 말하고, 겨울이도 옆에서 본인도 아파서 학교에 빠져서 실과를 재시험 봐야 한다고 서로 이야기하니 들어주는 사람인 엄마인 나는 고개를 이리 돌렸다가 저리 돌렸다가 하는데 갑자기 웃음이 났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결석하느라 못했던 자기 몫을 수행해야 하는 일에 핏대를 세우며 이야기하는 것이 감사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가족들 저녁을 차려주고 저녁 운동을 갔다. 거창하게는 운동이고 그냥 혼자 동네 한 바퀴 걷는 산책이다. 날이 적당해서인지 월요일 저녁인데도 공원길이 사람들로 붐볐다. 운동 갈 때마다 보는 동호회 모임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보았다. 열댓 명 넘는 인원들이 두 줄씩 서서 발 보폭을 좁게 하고 총총걸음으로 구호에 맞추어 걷는다. 나는 그들을 안 보는 척하면서 슬쩍 보았다. 앞장서서 구령을 붙이는 사람, 키가 작은 사람, 마른 사람, 통통한 사람, 키가 큰 사람, 머리를 껑충 묶은 사람, 쫄바지를 입은 사람. 모두 즐거워 보였다. 나는 그들을 천천히 지나치며 걸었다. 오늘도 조금씩 허리 디스크 증상이 있었지만 걷는 동안은 잊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겨울이에게 미숫가루를 타주고, 차 키를 챙겨 봄이와 여름이를 데리러 갔다. 출근길보다는 밤 운전은 캄캄하지만 한적해서 좋다. 아이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봄이와 여름이랑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는 길이 평온하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사람 마음이 어떨 땐 바늘 하나 꽂을 수 없을 만큼 옹졸해지다가도 어떨 땐 한없이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그것이 온전히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안다.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내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란다.



2023.5.15. 월요일

이전 08화나의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