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 쓰는 4월의 일기(feat. 벚꽃엔딩)
겨우내 목을 쭉 빼고 기다린 벚꽃이 밤에 내린 비와 강풍으로 벚꽃 잎이 바닥에 거의 떨어졌다.
일 년 여를 기다린 벚꽃이 몽우리가 올라오더니 며칠 활짝 피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있는 벚꽃나무는 조금 더 일찍 피고, 그늘진 자리 벚꽃나무는 좀 더디게 피었다. 아이들에게 '벚꽃 참 예쁘다. 어쩜 저렇게 예쁘니?' 했는데 벚꽃이 질 때는 다 같이 졌다. 어쩐지 내 마흔여섯의 봄도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이번 봄은 유난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디스크 멘붕이 오래 머물러있기도 했고, 가까운 친척의 자살 소식으로 자조감도 들어 힘들기도 했고, 새로 생긴 접촉성 알레르기로 또 한 번 멘붕이 오기도 했다. 마흔여섯 해를 살았는데 딱히 이루어 놓은 건 없는 지금의 나를 자각하자 자존감이 더 지하로 내려갔다.
내 자리에서 바르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아는 게 없어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정체된 삶을 살고 있었다. 남들이 나를 하찮은 사람으로 대하고 무시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내게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탈했다. 나를 비바람에 떨어진 벚꽃 잎 보듯이 이제 다 끝났구나, 벚꽃이 졌네 하고 돌아서는 사람들 같았다.
문득 어디에도 비빌 데가 없는 내가 안쓰러웠다. 남들은 부모에게 경제적 자원이나 정서적 자원을 물려받기도 하고 도움을 얻기도 하는데 어릴 때부터 내겐 정서적 자원조차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부모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자식들에게 뭐든지 해주고 싶었겠지만 형편이 안 됐던 거다. 돈을 많이 벌고 싶었겠지만 그들도 배우고 익힌 게 없어 방법도 몰랐으며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건지 몰랐던 것이다.
그저 아이들이 아프더라도 학교에 매일 빠지지 않고 가고, 숙제를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고, 자기 전에 양치를 꼭 하고, 내일 학교에 가져갈 가방을 미리 싸두는 일 등의 눈에 보이는 단면적인 목표를 이행시키는 것만이 그들의 최선이고 전부였으리라. 지금의 내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부모님은 사랑과 관심은 주었지만, 세상은 넓고 도전하면 무엇이든 해볼 만하다는 용기나 본보기는 되어주지 못했다. 하루를 소소히 살아내는 것뿐이었다. 어쩌면 나도 그 이상은 꿈꿔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바깥 너머의 세상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곳은 도착할 수 없는 저 멀리에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부모님보다 조금은 큰 집에 살고 있고, 꾸준히 직장을 다니고 있어도 그때의 삶이나 지금의 삶이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세상은 급속도로 변화하며 성장했고 정확히 내가 서있는 지점이 삼십 년 전의 그때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가난을 벗어나려고 열심히 발버둥 쳤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가난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는 듯하다.
아마 지혜나 지식, 겸양, 미덕, 부 이런 것들이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얻어지거나, 책을 읽는다고 해서 생긴다거나, 갖고 싶다고 해서 생기는 것은 아닌가 보다. 나는 자식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으며, 비빌 언덕도 되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내 삶은 버둥거렸다.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성실히 임했고 열심히 했지만 그게 다였다. 아니 돌이켜보면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뭐든지 안주하면서 지금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다른 걸 알아보려거나 풀밭을 넘어가 보려 하지 않고 지금에 만족하면서 살았다. 그게 나의 패착이었다. 왜 다른 길을, 다른 세상을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걸까. 요즘 강연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 공부를 시작하라는 조언이 많다. 마음에 굉장히 와닿는데 현실적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걸 찾는 것부터 실력이 아닐까 싶다.
2023.4.24 꿈꾸는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