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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기자 Jul 05. 2023

모든 요일의 기록  

독서 02. 나의 지중해

2022.4.14


어른이 되어 주말만 기다리며 사는 날을 보내던 나는 <평일도 인생이니까> 책을 읽고 평일도 내 인생이라는 걸 뒤늦게 자각했다.


월요일엔 아메리카노로 잠든 뇌를 깨워 일을 하고, 화요일에도 내 삶은 아메리카노라면서 다시 마음을 다지고, 수요일에는 출근 준비 중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오늘은 준 주말권에 돌입했으니 힘내시라는 조우종 디제이의 멘트를 들으며 준 주말권을 내심 기뻐하고, 목요일에는 아메리카노로 달래 지지 않는 내면의 자아를 덕질로 충전하고, 금요일에는 주말권에 돌입했으니 편의점 빵을 죄책감 없이 집어 들고 아메리카노와 함께 출근을 하고, 토요일에는 반나절의 무게를 빼고 반나절의 가벼움으로 보낸다.


내 일상이 내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이는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고 저장하며 지내다 보니까 평일도 나를 채우는 시간이 되었다. 복사기로 찍은 듯한 반복되는 일상의 나를 붙잡아 기록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기록도 지겨워질 때가 있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으며, 주기적으로 회의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기록이 하기 싫어질 때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줄을 계속 긋게 되는 여운이 남는 책. 읽고 나서 한참 동안이나 내 머릿속에서 서성이던 작가의 글들을 기록해 본다.




[모든 요일의 기록 / 김민철]

빵집 아들의 운명은 도넛이었다. 그렇기에 늘 텅 비어 있고,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 수밖에 없다. 그것이 김연수 작가의 깨달음이었다. <청춘의 문장들>에서 그 구절을 읽는 순간 갑자기 나는 나의 운명을 깨달았다.
 
나는 검은건반이었다. 마음 어딘가에 늘 어두운 부분이 있고, 그 부분을 밝히기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 아무리 해도 천성 저 바닥 밑까지 밝은 빛이 어리기엔 나는 좀 많이 어둡고 어느 정도는 불협화음과 같은 존재였다. 65



그러니 그건 나였다. 내 일상을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범인이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회사도 범인이 아니었고, 야근도 범인이 아니었다. 물론 파리도 범인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를 구원할 의무는 나에게 있었다. 매일은 오롯이 내 책임이었다. 76




이제는 반성문 대신 이 글귀를 읽는다. 서른여섯 살에도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붕붕 떠다니니까.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 중국의 시 - 77




출근이 아무렇지 않은 아침이라니. 출근은 내게 결코 화해 불가능한 어떤 것이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6년을 매일 회사를 가면서, 그 6년을 매일같이 나는 회사에 가기 싫었다. 막상 도착하면 또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할 거면서, 심지어 열심히 일할 거면서, 나는 매일 아침 출근이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출근이 아무렇지도 않은 아침이 찾아온 것이었다. 명백히 <시지프 신화>때문이었다. 명백히 김화영과 카뮈의 짓이었다. 83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것,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항상 깨어 있는 것,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부단한 성실성으로 순간순간에 임하는 것,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 오직 지금만을 살아가는 것, 오직 이곳만을 살아가는 것, 쉬이 좌절하지 않는 것,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 피할 수 없다면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일상에서 도피하지 않는 것, 일상을 살아나가는 것.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다시 듣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다시 읽어보고 싶은 글이 있었다. 이 글이 그랬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이야기를 기록한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쓴 책을 기록하고, 다른 사람이 만든 노래를 기록하고, 다른 사람이 나오는 드라마를 기록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여행하고 있었다. 소설을 읽고 있었다. 사람 냄새가 났다. 희미하지만 나도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배우고 있었다.

읽고, 찍고, 듣고, 쓰고, 배우고.
이 책을 읽으며 삶을 기록하는 이곳이 문득, 나의 정신적 지중해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의 숨 막혔던 지난여름 밤을 읽고, 달큰한 낙엽 냄새를 맡던 가을을 찍고, 쨍한 추위마저도 반가웠던 겨울이 오는 소리를 듣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을 쓰고. 지금 여기, 이곳이, 결국 내게는 지중해였음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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