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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계일주 Aug 22. 2023

꽤 괜찮은 해피엔딩

독서 03. 행불행을 재단하는 습관



나는 사고를 당한 사람인가. 아니면 사고를 만났지만 헤어진 사람인가. 사고와 헤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과정은 더뎌 쓰며 몸이 아픈 만큼이나 마음도 많이 아팠지만 조금씩 조금씩 흘려보내듯 헤어졌다. 나는 음주운전 교통사고의 피해자로 살지 않았고, 그때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머무르지 않고 매일 오늘을 살았다. 21


그런 분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하는 건 비교로 얻는 행복은 너무 쉽게 휘발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과 비교해서 얻은 감사와 행복은 결코 오래갈 수 없다. 비교 행복은 일시적인 진통제처럼 잠깐 위안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의 삶을 이끌어갈 힘이 될 수는 없다. 39


완주에 성공한 두 번째 이유는 애시당초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겠다고 덤비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라톤 시작 전 인터뷰할 때는 "걸어서라도 완주하겠다"고 포부를 밝혔지만 그러면서도 주머니에 든 지하철 교통카드를 계속 확인했던 건,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여왔던 내 다리에는 그만한 능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서였다. 그래서 정말로 10킬로미터만 걸어가고 지하철을 타려고 했다. 184


처음부터 너무 멀고 먼 미래, 사람들이 무모하다고 말하는 목표를 처음부터 세우면 앞으로 가야 할 거리에 압도되어 시작부터 지친다. 185


내가 그만두지만 않으면 레이스는 계속됐다. 가야 할 길은 42킬로미터인데 내딛는 걸음은 50센티미터 남짓. 한 걸음은 참 보잘것없고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한발 내딛고 그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일. 이 무의미해 보이는 반복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끝까지 갈 수 있었다. 187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마라톤을 달리는 중이다. 어느 만큼 왔는지, 또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어쩌면 더 어려운 마라톤이다. 때로 죽을 것 같은 고비를 만나기도 한다. 한 번 고비를 지나왔다고 해서 이런 고비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 그런 마라톤이 인생이다. 187




이 책은 얼마 전 유퀴즈에서 본 '이지선'님의 책이었다. 십 년 전 출간되었던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 책도 함께 빌려왔다.


이지선 님의 이야기는 뉴스와 방송에서 접한 적은 있었는데 이번에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유퀴즈에서 근황을 전할 때 한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다고 해서 깜짝 놀랐고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사고 이후의 삶이 책에 담겨 있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마음을 헤아리는 지점에서부터 출발해 본다.


음주운전 사고의 피해자가 아니라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라는 마음, 자신을 보면 한 번 더 뒤돌아보는 시선들과 괴물이나 이상한 사람이 되어 상처받았던 아픈 마음, 비교로 행복과 불행을 재단하는 사람들에 받은 상처를 봉합해 나가는 마음, 가족과 사회로부터 받은 지지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모여 꽤 괜찮은 해피엔딩으로 향해 가고 계셨다.


그녀는 사고 이후 40여 차례의 고통스러운 수술을 이겨냈다.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가족 간의 끈끈한 지지와 연대감, 보호, 사랑, 관심, 믿음 등이 중요함을 느꼈다. 내가 그녀였다면 이 모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만약에 내가 자신의 몸에 불이 붙는데도 그 불길 속에 뛰어들어 동생을 구하고도 고통스러워하는 동생을 보면서 한강으로 같이 뛰어들고 싶었던 오빠였다면, 끝까지 동생 옆을 지켜주었을 수 있었을까. 혹은, 내가 자신의 딸과 인생을 바꿀 수만 있다면 천 번 만 번이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엄마였다면, 수술실 앞에서 가슴을 수십수백 번 쓸어내리며 기도와 울음으로 마음을 잡고 수술 전 겁나하는 아이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가 다시 덤으로 얻은 삶이니 감사히 여기고 살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해 준 가장 큰 힘은 가족이었던 것 같다. 이제는 가족과 친구들, 목사님, 신앙, 그녀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에게 받은 감사와 사랑을 그녀는 다시 사회로 환원하고 있는 중이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음주운전 교통사고의 피해자로 살지 않았고, 그때 그 자리에 마음을 두고 머무르지 않고 매일 오늘을 살았다'라는 이야기였다. 다음이 있으려면 오늘을 살아야 하는데 나는 자꾸 되돌아보고 아쉬워하고 후회하고 원망하고 자책했다. 심지어 미리 다가올 내일을 당겨서 사느라 불안하기도 했다. 불행을 재단하는 습관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엄마로 살고 있는 나는 밥을 하고, 빨래와 청소를 하고, 직장을 다니고, 아이들을 챙기고 하는 일상들이 어떨 땐 산더미처럼 느껴져 버거울 때도 있고 보잘것없고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치워도 치워도 티 안 나는 집안일이 그랬고, 이제는 조금 내려놔도 괜찮겠지 하면 찾아오는 엄마나 아내, 딸, 며느리로서의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책임감과 무게들이 그랬다. 또, 블로그에 그 일상을 기록하는 무의미해 보이는 글쓰기가 그랬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한 뼘 더 자란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완주할까가 아니라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향해가는 여정에 있음을. 그러니 나의 마음을 어딘가에 메여놓지 말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행불행을 재단하지 말고, 무의미하다며 보잘것없다며 멈추지 말고, 지금 내가 머무는 이 자리에서 오늘을 살자.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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