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나이가 곧 엄마의 나이'라고 했던 오은영 박사님의 말씀처럼, '엄마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지낸 나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다. 첫아이라 모든 것이 서툴렀던 초보 엄마는 내 속으로 나온 나의 아이가 나와 같은 줄 알았다. 봄이가 수줍음이 많고 얌전하고 책을 좋아하며, 앉아서 사부작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나와 닮은 봄이로 보였다. 봄이는 올해 열일곱 살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된 봄이는 이제 수학은 혼자서 힘들 것 같다면서 수학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얘기했다. 나는 주변 이웃들에게도 묻고 인터넷으로도 검색한 뒤 집 근처 입시학원에 상담 신청을 하고 봄이와 방문했다. 아이의 성향을 파악해야 한다면서 설문지 두 장을 건네셨다. 아이 설문지와 엄마 설문지라고 하시며 각각 따로 문제 읽고 생각나는 대로 체크박스에 체크만 해서 제출해 달라고 하셨다.
엄마도 꼭 해야 되는지 내가 물었더니, '엄마의 성향이 아이의 진로와 공부법에 상관관계가 있으니 잘 체크해 주세요'라고 하신다. 설문을 끝내고 종이를 제출하자 호출을 받고 달려온 원장님께서 설문지를 눈으로 한 번 훑으시더니 그 짧은 시간 안에 17년을 같이 산 나보다 봄이에 대해서 더 많이 아시는 듯 말씀하신다.
"봄이야, 너는 앞으로 살면서 엄마 말을 듣지 않는 거야. 그게 너한테 도움이 돼."
음... 이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이 기시감은 뭐지.. 확신에 찬 단호한 말투는 묵직하게 나를 누르고 있는 책임감이란 무게도 덜어내면서, 열일곱 해 동안 쌓아 올린 나의 공까지 덜어내 버렸다.
원장님은 두 장의 설문지 결과를 한 장의 모눈지 그래프 안에 점을 찍더니 각각 다른 색으로 그래프를 그리셨다.
"자~ 보세요. 엄마와 봄이는 성향이 반은 똑같은데 나머지 반은 너무 달라요. 그런데 엄마의 성향대로 봄이의 진로를 정하는 건 위험해요. 봄이는 유치원 교사, 초등 교사를 장래희망이라고 썼는데 제가 보기엔 이건 엄마가 원하는 겁니다."
여기서 소름이 돋았다. 그건 어릴 때부터 나도 모르게 봄이가 이렇게 자랐으면 어떨까 하고 가둔 나의 프레임이었기 때문이다.
"봄이야, 너는 공감해 주고 배려해 주는 직업은 너의 성향과 안 맞아. 네가 정말로 가르치는 직업을 원한다면 대학교수나 이론을 전달해 주는 강의를 하는 게 오히려 네가 편할 거야. 선생님 생각은 그래. 너는 앞으로 그게 직업이든, 삶의 방식이든 엄마와 반대로 하는 게 너한테 도움이 많이 되고, 네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될 거야."
설문지 두 장으로 나온 결과는 나에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봄이는 엄마의 마음 따위는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원장님이 신기가 있는 분 같았다고 집에 와서 얘기했다.
"봄이야. 너는 너에게 칭찬해 주고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선생님보다, 까칠해도 논리적으로 설명을 정확하게 해 주시는 선생님이 좋지?" 봄이는 원장님이 하시는 말씀마다 연신 "네"라고 대답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옆에 앉은 나에게 눈빛을 보낸다.
학원에서 나오는 길에 봄이는 음정이 들뜬 채로 말한다.
"엄마, 우리 학원 상담 온 거 맞아? 점 보러 온 거 아니야? 오늘 처음 본 원장님이 족집게처럼 내 생각을 알아맞히고 어떻게 엄마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거야? 그게 가능한 거야?"
봄이는 그 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왜냐하면 학원 이름은 같은 세 곳의 학원 중에서 단과 학원이 아닌, 자소서와 학생부 종합평가를 관리해 주는 종합 학원에 상담 신청을 잘못한 까닭이다. 엄마의 어리숙한 정보로 잘못 찾아간 그곳에서 신기 내린 듯한 상담을 받은 봄이는 그 후로 많이 달라졌다. 본인이 문과 성향인 것 같아 고민해 왔는데, 상담받은 후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이과를 선택했다. 본인의 성향을 객관적으로 그러하다고 알게 된 뒤 봄이는 좀 당차 졌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나름 유쾌하고 똑 부러졌지만, 울타리 밖에서는 수줍음이 많아 조금 머뭇거리었는데 의사 표현이 조금 더 확실해지고 용기 있어졌다. 나는 봄이가 있는 그대로의 봄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나는 올해 엄마 경력이 열일곱 살이 되었다.
육아를 책과 TV로 배우고, 네 명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좌충우돌을 벗 삼아 아직도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엄마의 경력을 쌓고 있다. 시대가 빠르게 바뀌는데 육아와 교육이라는 곳도 예외는 없었다. 신입이 아니라 17년 경력자인데도 불구하고 쌓은 내공이 부족해서 실력이 들통날 때가 있다. 설문지 한 장으로 완성된 그래프는 뭔가 어긋난 엄마 성적표를 받은 느낌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잘못 찾아간 곳에서 받게 된 상담이 봄이의 진로 선택을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아이들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도 좀 더 폭넓게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단지, 아이들의 좋은 엄마가 되고자 노력했는데 그뿐이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어렵다. 엄마라는 정답지는 아이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이가 지나갈 눈길을 미리 쓸어놓는 희생적인 엄마는 자신이 없지만, 아이를 인정해 주고 마음을 수용해 주는 엄마는 되어주도록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