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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기자 Aug 27. 2023

여름이 출산기

기록 02. 서로가 서로를 고를 수 없었던 인연

뱃속에서 열 달을 품은 아이가 이 무더위를 나와 함께 보내고 찾아왔다. 워낙 더운 날씨였기 때문에 예정일보다 일주일 정도 먼저 나와줘서 오히려 고마웠다. 머리카락은 새카맣고, 얼굴은 빨갛고,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퉁퉁 부은 눈을 뜨지도 못한 채 아기 수달처럼 웅크리고 있던 아이를 안고 기뻐하던 그날의 우리가 떠올랐다. 기억이란 저 멀리 자욱한 물안개처럼  흐려져있다가, 그날의 상황과 분위기, 목소리들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자니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기억에 가까워진다.




첫째 봄이 때와는 달리 배를 가로지르는 듯한 짜르르한 진통이 단번에 느껴졌다. 이건 분명 가진통이 아니라 진통이었다. 정확히 10분 간격으로 찾아오는 악 소리가 절로 나는 뱃속을 가로지르며 휘젓는 듯한 진통이 시작되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였다. 나는 얼른 병원에 갈 채비를 했다. 혹시 몰라 미리 싸놓은 입원 준비물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다행히 동생이 주말 동안 집에 와있어서 첫째 봄이를 봐달라고 부탁하고, 남편은 토요일 오후였지만 일을 하고 있는 관계로 나 혼자 짐을 챙겨 택시를 타고 산부인과로 갔다. 침대에 누워 이것저것 검사를 했다. 태동 검사를 하면서 아기 심장 뛰는 소리를 들었다. 아기는 건강하게 있었고, 주기적으로 올라갔다 내려가는 자궁이 수축하는 그래프를 보시며 진통이 맞는다고 하셨다.


관장을 하기 위해 내진을 했는데 이미 자궁이 5cm쯤 열려있어서 관장은 못하고 이대로 진통을 하다가 출산을 하는 게 안전할 거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초산이 아니라 진행속도가 빠를 것 같다며 보호자를 찾으셨다. 그 해에는 남편이 멀리 있는 현장에서 일하느라 병원에 4시 반쯤 도착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다. 가족 분만실에서 분만 시 남편이 직접 탯줄을 자를 수 있다고 하시면서 분만 전에 꼭 남편이 와야 될 텐데 하시며 같이 초조해하셨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이 알려주신 호흡을 계속하고 있었다. "산모가 호흡을 제대로 못하면 뱃속에서 아기도 산도로 내려오는 게 힘들어져요. 자 숨을 크게 들이마시세요. 그다음 들이쉰 만큼 후~~ 하고 길게 호흡을 뱉어내세요. 호흡을 길게 뱉을 때 아기가 밑으로 잘 돌아서 내려올 거예요."


"네.. 후욱~    후 ~~~" 입은 마르고 온몸이 뒤틀렸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진통의 정도가 점점 세지는 탓에 내가 없어질 것만 같았다.


"산모분 이제 아기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자궁이 8cm 열렸네요. 자, 이제 분만실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날의 대기하던 병실의 하얀 체크 커튼과 간호사 선생님의 어스름한 형체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분만실은 약간 어두운 주황빛 조명이었고, 배 밑으로 작은 커튼이 쳐졌으며, 호흡을 도와주고 분만 시 유의점을 이야기해 주는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산모님. 소리 크게 지르지 마세요. 기운이 다 빠져요. 대신 진통이 오면서 아기가 나오려고 할 때 응가를 하는 것처럼 끙~하고 길게 힘을 끝까지 밀어내야 아기 머리가 안 다치고 나오니까 호흡을 놓치지 말고 그대로 힘주세요."


마침 남편이 도착했다. 의사 선생님이 콜을 받고 분만실에 들어오셨다.


"산모님.. 잘하고 있어요! 머리가 보여요!! 자, 이제 있는 힘껏 끙~~ 하고 밀어내세요!" 온 우주의 힘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나는 남아있던 나의 온 힘을 다해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밑으로 되직하고 미끄덩거리는 것이 확  빠져나가는 느낌이 났다. 내 몸을 관통하던 폭풍 속 파도 같았던 진통이 사그라들었다.



"ㅇㅇㅇ님 아기 오후 5시 태어났습니다! 손가락 발가락 모두 정상이네요. 딸입니다! 축하드려요!"



"응애~~ 응애~~!" 나와 함께 폭풍우 같던 고통을 이겨내고 드디어 우리가 엄마와 딸로 만난 것이다.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던 이슬아 작가의 책이 생각이 났다. 엄마와 딸, 서로가 서로를 고를 수 없었던 인연 속에서 열다섯 해 동안 엄마 곁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고맙고 사랑한다. 여름아, 생일 축하해!


2021.08.18 꿈꾸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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