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기자 Sep 13. 2023

가을 이야기

기록 03. 태어나보니 언니가 둘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드라마에서 덕선이가 언니인 보라와 가족들과 생일 파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덕선이는 서열상 둘째로 자라면서 서운했던 마음들을 가족들에게 절규하듯이 쏟아낸다. 본인도 사실은 계란 프라이를 좋아했다고. 언니 이름은 보라이고, 남동생 이름은 노을인데 왜 내 이름만 덕선이냐고. 왜 내 이름만 촌스럽게 덕선인지 따지고, 생일 케이크를 같이 하는 생일 파티가 어디 있냐고 울부짖으며 서운함을 토로한다.


문득 1988년보다 훨씬 시간이 지난 2015년 우리 집, 봄이와 가을이의 생일이 그 장면에 겹쳐졌다.

그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나는 별생각 없이 봄이와 가을이의 생일 날짜가 3일밖에 차이 안 난다는 이유로 생일 파티를 같이 해주었다. 우선 언니 봄이가 나이가 많으니, 봄이 나이의 초를 꽂고 불을 켜고 축하 노래를 해주고 사진을 찍은 후에, 다시 가을이의 나이에 맞춰 초를 꽂고 불을 켜고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때는 남편이 혼자 외벌이를 하고 있던 때라 경제적으로도 빠듯했던 시기여서 결과의 공정성에 초점을 맞추어 정당화시켰는데, 응답하라 1988 드라마에 나오는 덕선이 생일 파티 장면과 대사들이 우리 집과 오버랩되면서 봄이에게도 가을이에게도 너무 미안해져서 나는 덕선이와 함께 울먹였다.



나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 케이크를 한 개로 퉁쳐버린 악착같은 엄마가 되어 있었다.






가을이는 태어나자마자 언니가 둘 있었다. 양가 집 안의 첫아이로 태어나 늘 주목받는 예쁘고 총명한 다섯 살 봄이, 자신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며 귀여움을 발산하는 세 살 여름이였다.



나이는 나보다 다섯 살 많지만, 생각은 오백 살 더 많은 고루한 사고를 가진 조선시대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우리는 셋째를 낳기로 했다.



첫째도 딸, 둘째도 딸이니 이번엔 확률적으로 아들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남편의 기대와 달리, 임신 5개월 때 너무 긴장돼서 성별을 묻지도 않던 내게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 검사를 하시다가 무심코 말씀하셨다.



"산모님, 아기가 뱃속에서 아주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아기가 언니를 닮았네요. 축하드려요! 셋째니까 지금까지 해오신 대로만 하시면 셋째도 순산하실 수 있을 거예요."


"네?? 언니를 닮았다고요?! " 머릿속이 점차 하얘지고 있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목이 메어왔다. 좀처럼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말이었다.



산부인과를 나서며 병원 옆 작은 놀이터 그네에 앉아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자기야, 셋째도 딸 이래... 어떡하지?" 눈앞에 놓인 최악의 경우의 수가 눈앞에 그려졌다. 셋째가 딸이고,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 넷째를 낳는 것이다.


세상에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애를 넷이나 낳아. 난 자신이 없어. 내 인생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기고 있었다. 내게 다가올 파도가 무서웠다.









2009년 10월 11일. 셋째 가을이가 태어났다.


이제는 누구의 출산기인지 헷갈릴 법한데 태어난 날, 시간, 키, 몸무게, 혈액형, 진통의 양상까지도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어쩔 수 없는 엄마인가 보다. 가을이는 유난히 얼굴이 동그랗고 잘 웃고 잘 자고 순했다.


다섯 살 봄이는 내가 가을이를 낳고 집에서 산후조리 중이었는데 아침마다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유치원에 다녀오면 가을이와 같이 자겠다고 옆에 누워 얼굴을 부비부비하고 뽀뽀를 해주고, 자는 아이를 안아보고 싶다며 엉성한 폼으로 가을이를 안아주곤 했다. 세 살 여름이도 봄이가 가을이 옆에 누워 자장자장 해주면 본인도 해주겠다며 반대편에 누워서 같이 토닥여주었다. 그 해에 셋이 찍은 사진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내가 지레 겁먹던 거센 파도는 다행히 파도에 함께 올라탄 우리 봄이와 여름이 덕분에 큰 걱정에 비해서 그나마 수월하게 그 해를 보냈다. 가을이는 태어나서 3년간 우리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지극히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다. 그 발냄새 양말의 범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2021.10.11 꿈꾸는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이 출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