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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계일주 Sep 12. 2023

파친코

독서 08. 그들이 우리가 될 수 있다





파친코 첫 시작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어느덧 선자로 살고 있었다. 책을 펼치면 나는 언청이에 절름발이 아버지 훈이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선자가 된다. 훈이 아버지가 죽고, 선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억척같이 살아가는 엄마 양진과 하숙집을 하면서 지내다가 고한수의 아이를 갖게 된다. 고한수는 이미 일본에 가정이 있는 남자였고, 선자는 자신을 책임지겠다는 고한수를 거절하고 하숙집에 머물던 목사 백이삭의 청혼을 받아들여 일본으로 함께 건너간다. 일본에서 이삭의 형인 요셉과 부인 경희와 함께 살게 된다. 고한수의 아들 노아는 공교롭게 이삭을 닮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백이삭의 아들 모자수는 거침없는 고한수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노아가 죽었을 때 너무 놀라서 울컥하고 울음이 났다. 충격이었다. 단 한 줄 문장이 전부였다. 믿기지 않아서 책을 다시 살펴보아도 이어지는 문장은 없었다. 노아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토록 존경하던 백이삭의 아들이 아닌 더러운 피가 흐르는 야쿠자 고한수의 아들이란 걸 알게 되고 고통스러워하던 노아는 와세다 대학을 자퇴하고 사라진다.




고한수가 16년 만에 사라진 노아를 찾고 엄마 선자와 함께 노아를 찾아간다. 노아는 '반 노부오'라는 일본인으로 파친코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결혼하여 딸 셋, 아들과 함께 안정적으로 지내는 듯이 보였다. 선자가 찾아간 다음 날 선자는 알게 되었다. 선자를 만나고 돌아가서 노아가 총으로 자살했다는 걸.






그날 저녁, 노아가 전화를 하지 않았을 때 선자는 노아에게 요코하마의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선자는 한수의 전화를 받았다. 한수는 선자가 노아의 사무실을 떠난 직후에 노아가 총으로 자살했다고 말했다.


 -파친코 2, 저주받은 피 233p.-




노아는 고한수가 다시 본인을 찾았다는 사실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야쿠자인 아버지 고한수의 굴레로 들어가기 싫었던 것일까.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것일까. 엄마 선자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숨 쉬는 것마저도.





파친코에서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노아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이민진 작가는 많은 노아를 알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우리 대부분 삶이
노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깊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만난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규칙, 도덕규범 및 전문 용어로
완성된 자신의 분야의 문화에
매우 높은 수준으로 동화되었습니다.
 
우리가 노아가 아니라면,
우리 안에는 노아 부분이 있습니다.
나는 노아에 대해 깊이 느끼고 있으며,
나는 많은 노아를 알고 있습니다.


- 이민진 작가 홈페이지 인터뷰 내용 중에서 -






작가의 말대로 우리 대부분의 삶이 노아였기에 노아의 죽음에 더 안타까워하고 충격으로 다가왔나 보다. 우리는 대체로 노력으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 왔기에.



노아는 자신의 규칙을 세워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바르고, 또 자기 힘으로 삶을 일구어 나가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사람이다. 노아가 목사인 백이삭이 아버지가 아니라 야쿠자인 고한수가 아버지라는 걸 알았을 때, 어떠한 노력을 해도 이제 바뀔 수 없다는 좌절감이나 무력감 그리고 본인이 정할 수 없는 이미 결정된 삶에 대한 분노가 이방인의 작은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그의 마지막 선택이 이민진 작가가 만난 많은 이방인들 중 한 가지 삶의 방편이었다고 되짚어보니 더 슬펐다.








한국계 1.5세인 미국 작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



굉장한 문학 작품이었다. 감탄했고 감동했고 경이로웠다. 몰입했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였다. 등장인물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사라지고 이어졌다. 시나 에세이, 자기 계발서를 읽는 것은 독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글을 해석한다면 소설은 작가가 독자를 설득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나를 계속 설득했다. 선자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노아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야기하고, 이삭이 왜 노아를 받아들였고 고한수는 왜 계속 선자와 노아를 도와주었는지 이야기했다. 이미 가정이 있는 남자이고, 야쿠자였는데도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선자를 위해 남몰래 도움을 주려는 모습 등은 아버지로서의 부성애와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악인이라고 생각했던 인물들도 결국은 작가가 어떻게 독자를 설득하느냐에 있었다. 파친코에 나오는 인물들은 열심히 하루하루를 산다. 허투루 살지 않는다. 고된 일상을 살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책의 첫 문장이 이 책을 관통하고 있었다.



이 소설의 흐름은 내가 예상치 못한 전개로 흐른다. 파친코의 뜻도 모르고, 어떤 내용인지 모르고 읽었기에 더 몰입해서 읽은 것 같다.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내국인이면서 끝내 이방일 수밖에 없었던 자이니치(재일 동포)들의 4대에 걸친 핏줄의 역사 이야기이다. 선자의 아버지 훈이 죽고, 남편 이삭이 죽고, 특히 아들 노아가 죽었을 때 나는 이러다가 이 소설이 끝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노아가 죽고 나서는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의 삶이 이어진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성품이 올곧은 사람, 열심히 사는 사람, 정직하게 사는 사람, 순리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 타협하는 사람, 굴복하지 않는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 아이를 목숨처럼 생각하는 사람, 전쟁통에 살아남고자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 등이 나온다. 인생의 민낯을 낱낱이 보는 것 같았다. 어느 한 부분도 오려내지 않고, 사람 사는 것을 오롯이 담았다. 그것도 이국땅에서. 그래서 더 슬펐다.



이민진 작가는 파친코는 은유적인 뜻이라고 했다. 도박은 그 안에서 행운을 잡기도 하고 불행을 잡기도 한다. 어쩌면 처음 시작부터 판을 깔아놓은 주인이 이미 결과를 결정지었을 수 있다. 남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파친코를 비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아는 열심히 공부해서 계층 사다리 높은 곳인 와세다 대학에 들어가 일본인처럼 살고 싶었지만 자신이 조선인 야쿠자의 더러운 피가 흐른다고 좌절했고, 모자수는 정직하게 파친코를 운영하지만 일본에서는 그저 조선인 야쿠자일 뿐이었으며,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 은행에 취직했으나 끝내는 밀려나서 아버지인 모자수의 파친코 사업장으로 돌아온다.



재미교포로 살았던 이민진 작가가 미국에서 알게 모르게 겪었을 보이지 않는 차별이나 편견, 이미 정해진 판에서 어떠한 노력으로도 받아들여지기 힘든 이방인의 설움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더 몰입해서 이 소설을 구상부터 탈고까지 30년에 걸쳐 완성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조국만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 어디를 가도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상 모두가 다 타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


- 파친코 2, 작품 해설 394p. 김성곤 (서울대 명예교수/조지 워싱턴 석학교수) 책을 덮으며 12세기 유럽의 사상가 성 빅토르의 휴의 말을 떠올려본다.



이민진 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이민진 작가는 남편을 따라 도쿄에서 지내는 4년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 시대에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 소재는 열아홉 살 때 관심을 가지고 초안을 쓰기 시작했지만 2007년 일본에 건너가서 실제로 접한 자이니치(재일 동포)의 삶과 달라서 기존에 썼던 글을 수정하면서 다시 완성본까지 쓰는 데 30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녀는 글을 방 안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겪은 사실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 소설에는 인물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민진 작가는 문학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써야 했던 이유로 그 장면들이 인물들의 관계를 특징짓는 데 도움이 되고, 중요한 것은 끔찍한 박탈과 낙담의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의 일부를 인간화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민진 작가는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한국인 3부작 중 세 번째라고 생각하는 American Hagwon을 작업하고 있고 전 세계 한국인들에게 교육의 중요성과 위험성에 대해 쓰고 싶다고 말했다. 이민진 작가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아마 작가의 일은
 
'그들이 우리가 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것일 것입니다.




- 이민진 작가 인터뷰 중에서 -







"제가 부탁하는 것은 16시간 동안 저와 함께 놀아달라는 것입니다."라고 파친코가 읽는 데 걸리는 시간을 언급하면서 이민진 작가가 말했습니다"그것은 꽤 큰 일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보상"만약 당신이 한국인이 될 수 있다면, 그 16시간 동안만... 그러면 당신은 낯선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곳에서 낯선 사람들은 당신의 경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목표입니다."



- 이민진 작가 인터뷰 중에서 -



작가의 의도를 모르고 읽었는데 나는 정말 16시간 동안 낯선 바다를 건너서, 그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들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소설이 '그들이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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