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에게 사랑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젊은이들이 밝고 자유롭게 미래를 펼쳐가기를 얼마나 기원했는지, 하찮은 것에서 길어 올린 빛나는 진실을 얼마나 고심했는지, 생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절절하게 마음이 벅찼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얼마나 정직하고 엄격했던지 그 담금질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 늦은 가을 아치울에서, 호원숙 -
차례
# 친절한 사람과의 소통
하루는 산에서 열쇠를 잃어버렸다......
다시 한눈을 팔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열쇠가 바로 길가 내 눈높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가 주워서 그렇게 눈에 띄게 걸어 놓았을 것이다. 그 산책 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은 내가 낸 길도 아니었다. 본디부터 있던 오솔길이었으니 누군가가 낸 길이고 누군가가 현재도 다니고 있어서 그 길이 막히지 않고 온전한 것이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15
# 다 지나간다
유년의 뜰을 떠난 후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의 열 곱은 되는 몇십 년 동안에 맛본 인생의 단맛과 쓴맛, 내 몸을 스쳐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격렬했던 애증과 애환, 허방과 나락, 행운과 기적, 이런 내 인생의 명장면(?)에 반복해서 몰입하다 보면 그렇게 시간이 가버린다.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 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110
#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예사로운 아름다움도 살날보다 산 날이 많은 어느 시기와 만나면 깜짝 놀랄 빼어남으로 빛날 수 있다는 신기한 발견을 올해의 행운으로 꼽으며 1982년이여 안녕. 118
# 행복하게 사는 법
엄마한테 귀가 따갑게 들은, 남의 좋은 점을 찾아내면 네 속이 편하고 네 얼굴도 예뻐질 거라는엄마의 잔소리는 철들고 어른 되어,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안 듣게 된 후에 오히려 더 자주 생각나고, 어떡하든지 지키고 싶은 생활신조 같은 것이 되었습니다.... 남의 좋은 점만 보기 시작하면 자기에게도 이로운 것이, 그 좋은 점이 확대되어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134
# 사랑의 입김
어린 날, 내가 누렸던 평화를 생각할 때마다 어린 날의 커다란 상처로부터 일용할 양식, 필요한 물건, 입고 다니던 입성, 그리고 식구들 사이, 집 안 속 가득히 고루 스며 있던 어머니의 입김, 그 따스한 숨결이 어제인 듯 되살아난다. 그것을 빼놓은 평화란 상상도 할 수 없다.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고 슬퍼하지 않은 어린 날이 어디 있으랴. 다만 그런 일이 어머니의 입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행복과 평화로 회상되는 게 아닐까? 167
# 중년 여인의 허기증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216
#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요 바닥에 엎드려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뭔가 쓰는 일은 분수에 맞는 옷처럼 나에게 편하다. 양말 깁기나 뜨개질만큼도 실용성이 없는 일. 누구를 위해 공헌하는 일도 아닌 일, 그러면서도 꼭 이 일에만은 내 전신을 던지고 싶은 일, 철저하게 이기적인 나만의 일인 소설 쓰기를 나는 꼭 한밤중 남편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하고 싶다. 220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221
# 나의 문학과 고향의 의미
이렇듯 나의 시골 고향은 도시 빈민층 아이들 앞에선 자존심의 근거가 됐지만, 학교에선 벗어나고픈 궁상이요 남루였다. 229
비켜나 있음을 차라리 편안하게 여기게 되었고, 와중에 있는 것보다는 약간 비켜나 있으면 돌아가는 모습이 더 잘 보인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232
#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안 죽는 것이다.이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은 없다지만 너무 안 죽고 오래 살아 혈육이나 친구 중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죽는 걸 보아야 하는, 순서가 바뀐 죽음처럼 무서운 건 없다.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264
# 마음 붙일 곳
그런데 떠날 준비가 정을 떼는 게 아니라, 마음 붙일 것들을 조금씩 늘려 가는 것이라니. 272
내 속으로 난 자식도 마찬가지다. 그의 몸이 생겨날 때 나는 게울 것 같은 이물감을 가졌고, 점점 부풀어 심장까지 차오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죽을힘을 다해 내 몸으로부터 떼어냈다. 내 몸의 진액을 짜내어도 짜내어도 고 작은 것은 허기져했고, 날마다 포동포동 살이 찌는 내 새끼를 내 손으로 씻기면서 날로 굳세고 아름다워지는 몸을 보면서 느낀 사랑의 기쁨을 무엇에 비길까. 276
그런 내 새끼 중의 하나가 봄의 절정처럼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이 세상에서 돌연 사라졌다.
만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건 포옹도 오열도 아니다. 때려주고 싶다. 요놈, 요 나쁜 놈, 뭐가 급해서 에미를 앞질러 갔나, 응? 그렇게 나무라면서 내 손바닥으로 그의 종아리를 철썩철썩 때려주고 싶다. 276
책을 읽고 나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660편에 달하는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 중에서 보석 같은 35편을 모아 편 낸 책이라고 한다. 시간의 흐름대로 글이 이어지진 않지만 흩어져 있던 시간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이 읽었다. 마치 작가님을가까이서만나 뵌 기분이다.
여아를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이 밤새 머리를 맞대고 옥편을 찾아가며 지으신 불평했었던 '박완서'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어린 시절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와 비슷해서 무척이나 공감했다.
유년 시절에는 때로는 어리광도 부리고 대단한 울보였었고, 손녀 재롱을 보고 싶다며 천자문을 가르치신 할아버지 덕분에 배움을 시작했다고 한다.할아버지의 손녀사랑도 컸지만 지금의 박완서 작가님을 있게 한 분은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완서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시댁의 걱정과 염려를 무릅쓰고 어린 남매를 데리고 서울로 떠난다. 그 시대에 시댁에서 나와 남편도 없이 사랑의 입김으로 남매를 보살피고, 적극적으로 공부를 시키는 강단 있는 분이셨다. 삯바느질로 살림을 하면서도 신여성이 되라고 어린 박완서를 소학교에 보내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인생의 동반자였던 남편을 먼저 보내고, 사랑하는 아들을 앞세우고, 본인이 떠나게 된다면 가을이었으면 좋겠다던 박완서 작가님의 묵직한 글들이 마음에 남았다. 그런데 떠날 준비가 정을 떼는 게 아니라, 마음 붙일 것들을 조금씩 늘려 가는 것이라니. 그게 어떤 마음일지 최근에 내 일상을 기록하면서 깨닫고 있다.
할머니가 되셔서 손자를 예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글들은 유년 시절의 작가님을 예뻐하고 아끼시던 할아버지를 그린 글이 떠오르며 나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도 생각나서 먹먹해지고 그리워졌다.
부끄럽게도 박완서 작가님 책을 읽은 건 <그 많던 싱어는 누가 먹었을까> 이후로 이 책이 겨우 두 번째 책이다. 그때는 읽었어도 느끼지 못했던 감응을 이제야 느끼는 걸 보니 나도 살아온 날이 많아졌나 보다. 20년 전에 읽었던 <그 많던 싱어는 누가 먹었을까> 책을 책장에서 찾아 다시 펼쳤다.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었는데 지금 읽으니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일렁이는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작가님이 내게 이야기꾼을 자처해 소박한 듯하지만 단단한 일상을 나지막이 들려주신다. 곱씹어 읽으면 더 좋은 글이다. 차곡차곡 쌓아온 경험치의 글이 '인생 살아가는 비밀 노트' 한 권을 선물 받은 기분이 든다. 읽고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문장이 새롭게 보여서 자꾸 담는다. 눈에 담고, 귀에 담고, 가슴에 담고, 블로그 서랍에 담고.
"글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에선 뭔가 조금씩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꼈다."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