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의 동반자
일기 20. 서로 복닥이면서 우리는 자랐다
결혼기념일 (feat. 당신은 나의 동반자 )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남편을 따라 정착한 지 열여덟 해가 지났다.
처음 결혼해서는 6개월 동안 시댁에 들어가 방 한 칸에서 신혼을 시작했다. 지역이 달라져 기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 직장을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바로 임신을 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입덧은 막상 겪어보니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서 내가 아닌 날들이 늘어가는 것이었다.
내 속으로 난 자식도 마찬가지다. 그의 몸이 생겨날 때 나는 게울 것 같은 이물감을 가졌고, 점점 부풀어 심장까지 차오르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죽을힘을 다해 내 몸으로부터 떼어냈다. 내 몸의 진액을 짜내어도 짜내어도 고 작은 것은 허기져했고, 날마다 포동포동 살이 찌는 내 새끼를 내 손으로 씻기면서 날로 굳세고 아름다워지는 몸을 보면서 느낀 사랑의 기쁨을 무엇에 비길까.
'박완서'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중에서
임신했을 때 나는 게울 것 같은 이물감을 가졌는데 몹시 고달팠고, 반면에 몹시 신비로웠다. 이 지독한 입덧이 내 안에 나 아닌 다른 생명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직장에서 점심으로 선지 해장국을 허겁지겁 맛있게 먹어놓고는 일어나는 순간 드라마 한 장면처럼 꺼억거리는 걸 겨우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화장실로 달려가 게워내야 했다.
위에서 식도로, 식도에서 목구멍으로, 다시 입으로 시뻘건 기름으로 샤워를 하고 나면 입안이랑 속이 따끔따끔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그런데 속이 헐어 따끔한 것보다 뱃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게워낸 선지 해장국이 못내 아까웠다.
지하철 출근길에서였다. 그날은 전철에서 내리다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앞뒤로 빼곡히 둘러싸여 있는 닫힌 공간에서 가슴이 답답하고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워져 왔다.
중간에 내리면 지각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었다. 도착지 전철역 문이 열리자마자 내렸다. 순간 정신을 잃은 채로 그 자리에서 바닥에 쓰러졌다.
얼마나 지난 걸까. 정신이 들어 일어났을 때, 주변은 아침 출근길이라 제 갈 길 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아침 뉴스에서 보던 장면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흐릿하지만 재빠르게 지나갔다. 전철역 바닥에 쓰러진 나를 흔들어 깨워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입덧 때문에 자꾸 토해서 속이 비워진 상태에서 오는 저혈압 증상이었던 것 같다.
지하철에서 쓰러진 이후에는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이번엔 버스가 길을 돌고 돌아 확 꺾고 비탈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 울렁거림에 내 속이 견디질 못했다. 가방에 챙겨 온 비닐봉지를 꺼내어 헛구역질을 해야 했다. 입덧은 나의 정신과 육체를 자주 바닥으로 데려갔다.
2022년
지지난 주 수요일 밤이었다. 거실에서 빨래를 개면서 '나는 솔로'11기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여름이가 내 옆에 개어놓은 본인 옷을 가져가다가 티브이를 보면서 말했다. "엄마. 나는 저 사람이 나은 것 같은데? 저 사람 겨울이 닮은 거 같아." 나도 첫인상은 저 사람이 가장 무난하다 싶었는데, 여름이와 호감 가는 사람이 비슷해서 놀랐다.
다음 날 봄이에게 '나는 솔로' 이야기를 했다. 여름이와 엄마가 호감 가는 이상형을 말했는데 그 사람이 똑같아서 놀랐다며 누구인지 맞춰보라고 했다.
봄이는 6명의 남자 출연자 중에서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긴 영철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엄마, 근데 난 저 사람이 좋은데?"라고 하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꺄악! 엄마, 근데 저 사람 말이야. 아빠 얼굴이 보여. 뭐지? 난 아빠가 이상형이 아닌데, 왜 저 사람이 제일 괜찮아 보이지?"라며 거부반응을 보였다.
"봄이야, 놀라지 말고 들어. 엄마랑 여름이가 말한 사람은 키 크고 잘생긴 영철이가 아니야. 바로 네가 말한 저 사람 영식이야." ㅋㅋㅋㅋㅋ
"꺄악~~~~!!!!! 뭐야?! 우리 셋 다 저 사람을 픽했다고? 왜지?? 원래 사람은 자기가 주변에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가. 나 어떡해~"라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실감하는 듯했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라고 했다. 자기 주변에 남자는 아빠와 겨울이뿐인데 '나는 솔로'에 나온 남자 출연자 중에서 얼굴만 공개되었는데 끌리는 사람이 셋 다 같다는 건 엄마가 아빠랑 결혼했기 때문이란다. 우리의 이상형은 정녕 금쪽이 남편이었던 것인가...
지난 18년 동안 봄이는 내 인생의 동반자였다. 봄이가 들으면 까무러치겠지만 난 그랬다. 내 뱃속에서 하루 24시간, 열 달을 같이 보냈다.
봄이가 태어난 후에는 눈 뜨자마자부터 눈 감을 때까지, 혹은 자는 중에도 숨소리에 귀 기울여야 했다. 세 명의 동생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육아의 롤러코스터도 내 뒷자리에 동생들과 함께 탑승했다.
봄이를 낳고 그 이후에 차례로 동생 세 명을 더 낳으면서 하루하루가 아니 일분일초가 바빴다. 24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의 속도로 난 롤러코스터를 탑승하고 있었다. 롤러코스터에 탑승하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 두리번거리다가 겨우 안전벨트를 하고 숨 고르기도 못 한 채 그렇게 나는 돌아가고 있었다.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서 난 다리에 힘이 풀리고, 소리를 하도 질러서 목도 아프고, 손잡이를 얼마나 꽉 잡았는지 온몸이 후들후들 떨려왔다. 기운이 없어졌다. 십삼 년이 지나있었다. 몸에 기운이 다 소진된 채로.
영화 <연인>에서 이런 대사가 있어요.
"내가 나일 수 없던 시절,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준 사람"
인생의 장점은 빛나던 어떤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로 살았던 시간,
내가 나일 수 있었던 시절입니다.
내가 나일 수 있었던 시절은 언제였을까? 내가 나일 수 없던 시절에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준 사람은 돌이켜보니 바로 우리 아이들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서 걸었으면, 스스로 할 일을 했으면, 내 손이 안 필요했으면 했다.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그냥 오롯이 나로 살고 싶었다. 아침에는 비장하게 다짐하지만, 밤이 되면 파김치가 되어버리는 독박 육아였다. 나의 저질체력은 그때 완성되었다.
내 몸의 해방만이 아니라 내 존재의 해방을 바랐다. 어딘가로 뛰어내리고 싶었다라든가 땅속으로 꺼져버렸으면 좋겠다라든가 식의 무시무시한 생각들이 자주 찾아오는 시절이었다. 몸은 잔뜩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마음은 비스킷처럼 자주 부스러졌다. 시간이 모자랐고, 마음도 모자랐다. 무엇이 소중한지 잘 몰랐던 시절이었기도 했다.
돌아보니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준 사람은 바로 우리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보듬어주고 닦아주면서 나도 어른이 되려는지 버둥거렸다. 스물여덟 살에 엄마가 되었는데도 주변에서는 애가 애를 키우는 것 같다고 그랬다. 엄마와 자식의 인연으로 만나 서로 복닥이면서 우리는 자랐다.
결혼기념일을 주제로 생각하면서 글을 쓰다 보니 문득 지나온 시간이 선물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 나를 나일 수 있게 만들어 준 인생의 동반자는 소중한 아이들과 금쪽이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지나온 시절처럼 함께 지지고 볶을 날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 시간들이 나를 또 자라게 해 줄 것이다.
2022.11. 21 결혼기념일에 쓰는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