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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일상 Oct 03. 2023

엄마의 일기장

일상 02. 엄마의 일기는 절대 읽지 마


해가 짧아지면서 밤이 일찍 찾아오는 덕분에 아이들과 저녁 산책을 못 나가는 대신, 거실 전기장판에 배를 대고 엎드려 책을 읽곤 한다. 아이들과 쪼르륵 엎드려 함께 책을 읽는 날은 그 평온함만으로도 마음이 채워진다.

JTBC 용감한 솔로 육아 <내가 키운다>라는 프로그램을 채널 돌리다 우연히 보게 되었다. 김나영이 아이 둘과 함께 어머니 산소를 들러 인사를 하고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나영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초등학교 입학식 하루 전날 방 청소를 하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마지막 기억이라고 했다. 어린 김나영이 상처받을까 봐 어른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실을 숨겼지만, 혼자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하고 마음속으로 이별했다고 이야기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 나를 두고 떠나야 했던 엄마의 가는 길이 너무  무거웠겠다." 라며 김나영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출연자 모두를 울컥하게 만들고, 시청자인 나도 함께 울컥했다.

어린 시절에 엄마가 손등에 입방귀를 해준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그 입방귀를 두 아이에게 해줄 때마다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난다고 했다. 아.. 갑자기 코 끝이 매콤해지고.. 눈물이 핑 하고 돌다가 마음 구석구석까지 매운 내가 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나도 이랬겠구나 하고 부모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태어났을 때, 뒤집기를 했을 때,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옹알이를 하다가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말문이 트였을 때... 그랬던 우리 아이가 커서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아이가 소녀가 되고, 숙녀가 되고, 엄마가 될 때까지 얼마나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을까.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마음이, 내 마음 같아서 쑴벅쑴벅 쿡쿡 쑤시다 못해 저며온다. 한없이 무거웠을 심정이 온몸으로 전해져서 나도 함께 울었다.






올해 초 봄이었다.

겨울이와 마트에 갔다가 바람도 차고 춥길래 차 안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선 차 안 라디오를 켜놓고 내 핸드폰을 쥐여주며 말했다.


"겨울아, 물건 한 개만 사면 되거든. 엄마 5분이면 올 거야. 심심하면 사진 찍은 거 보고 있어."


차 안으로 다시 돌아온 나는 너무 놀랐다. 핸드폰을 든 채로 겨울이가 펑펑 울고 있었다. 눈물범벅이 되어 나를 끌어안았다. 잠깐 사이에 누가 와서 해코지라도 하고 간 건 아닌지 그 짧은 사이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울고 있는 아이를 부둥켜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더니 겨울이가 내 핸드폰을 내밀었다.


"엄마, 이거 때문에 울었어."


깜깜해진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다. 메모에 틈틈이 써놓은 내 일기가 보였다.


"엄마가 돌아가신 아빠 이야기를 쓴 일기가 너무 슬펐어. 그래서 내가 내 글도 적어놨어."


열 살 겨울이가 내가 쓴 일기에 덧붙여 서툴게 써 내려갔을 그 마음이 전해져서 나도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울면 안 되는데 같이 울었다. 대낮 마트 앞에 주차된 차 안에서 무슨 커다란 사연이라도 있는 것 마냥 함께 울고 있는 어른과 아이가 있었다.


메모장 일기 글에는 겨울이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성 리뷰가 덧붙여 저장되어 있었다.


'겨울이가 말합니다', '겨울이가 너무 슬퍼요'


며칠 뒤 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겨울이 이야기를 했더니 열일곱 살 봄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겨울이는 큰일이야. 엄마 닮아서 너~~~ 무 감성적이야.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야."






요즘 블로그에 기록을 하다 보니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겨울이가 옆에 와서 묻는다.


"엄마, 또 핸드폰 해?"


"응, 엄마가 핸드폰에 일기 쓰느라 그래. 너도 읽어볼래?"

"아니~ 엄마 일기는 너무 슬퍼서 절대 안 볼 거야. 누나! 누나들도 엄마 일기는 절대 보지 마!"






감성 엄마와 감성 아들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성 리뷰에 찬물을 냅다 붓는 봄이의 이성적이다 못해 냉소적인 리뷰가 좋았다.


나는 봄이가 내 속에서 나왔지만 나와 다름이 좋았다. 닮은 구석도 있지만 다른 구석이 있는 점이 좋았다.

나는 겁이 많아 놀이 기구를 못 타지만, 봄이는 겁도 없이 놀이 기구를 타는 점이 좋았다. 나는 기분이 태도가 되어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봄이는 한 발짝 떨어져서 상황을 보고 이성적인 대화로 나를 잠잠하게 만들어 주는 점이 좋았다.

다만,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던 나의 어린 시절과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라는 딸의 현재는 닮아있다. 봄이는 봄이의 호흡대로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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