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났는데 하늘이 잔뜩 흐리고 비는 부슬부슬 내렸다. 냉동실에 있던 순댓국을 해동해서 냄비에 넣고 끓였다. 파 송송 썰어 듬뿍 넣고, 소금과 후춧가루도 넣어 남편과 아이들 밥을 차려준 후, 나는 밥 대신에 고구마를 쪄서 열무 얼갈이김치와 함께 먹었다.
비도 오고 마땅히 할 일도 없어서 겨울이의 찢어진 운동복 바지를 수선하러 뉴코아에 갔다. 3층 코너에 수선점이 있는데 맡기고 30분만 기다리면 완성되는 장점이 있다. 찢어진 바지를 보여드렸는데 그냥 박음질만 하면 될 줄 알았던 나의 생각과 달리 천을 덧대어 지그재그로 박을 예정인데 아무래도 몇 번 더 입음 다시 찢어질 확률이 아주 높다며 수선을 만류하셨다. 그냥 버리고 새 바지를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듣고 보니 그랬다.
집에 가려는 길에 여성 매장 매대에 놓인 블랙 바지가 눈에 들어와서 들어갔다. 마침 정말 블랙 바지가 필요했다고 나를 합리화하면서 바지 하나를 샀다. 39.900원에 신상 부츠컷이면 잘 산 거라고 흡족해하며 집에 가려고 1층으로 내려갔다.
뉴코아에서 나가는 길에 커피 향에 고개를 돌려보니 '던킨도너츠'가 있었다. 앞에 잠시 서서 머뭇거리다가 '그래, 오늘같이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가 좋지' 하며 들어갔다.
날은 잔뜩 흐리고, 비도 오고, 세수와 양치만 하고, 잠깐 수선만 하려고 운동복 차림으로 머리 질끈 묶고 나왔는데 그냥 보이는 대로 평소 필요했던 바지도 눈에 띄어 하나 사고, 커피 향에 이끌려 의식의 흐름대로 아메리카노 사서 혼자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잠이 덜 깬 듯한 모습으로 와서 쇼핑을 하고, 카페에 앉아서 커피까지 마시다니, 예전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나 보다. 누가 나의 글을 자세히 읽어주지 않는 것처럼, 이런 추레한 모습도 사실 아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져서 혼자 창밖을 보며 마시는 이 시간이 좋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보고, 계획에 없던 카페행이라 핸드폰으로 오랜만에 블로그 이웃님 방문도 하고, 내 옆에 앉은 분의 대화도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 들렸다. 엄마와 중학생 딸이었는데 딸의 요즘 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듣고, 어른으로서 인생 선배로서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는데 그 대화가 너무 좋았다. 나도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참 좋은 분이다 싶었다.
집에 가려고 카페를 나서는데 1층에 화장실이 없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다시 1층으로 가려는 길에 할인행사 매장에서 블랙 바지 70~50%가 쓰인 문구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아까 산 바지는 할인가가 아니니 혹시 비교나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거기 한쪽에 걸린 바지는 10.000원에서 15.000원이었다. 대신 교환, 환불은 불가였다.
어차피 같은 블랙 바지이고 신상과 할인의 차이라면 입어봐야겠다 싶어서 바지를 입어봤다. 아까 산 신상 바지는 부츠컷이라 내게는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 바지는 이월 상품이어서 그런가 일자핏이고 길이도 딱 맞아서 자르지 않아도 되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영화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나는 '그래, 지금 안사면 또 언제 사'하면서 블랙 바지 2개와 청바지 1개를 충동구매했다. 그러면서 '10.000원짜리 바지 3개를 샀으니 아까 산 39.900원짜리 신상 바지는 환불하면 되겠다'라는 생각에 여기 지나가기를 잘했다면서 혼자 기뻐했다.
막상 신상 바지를 다시 환불하려고 그 매장에 갔는데, 사람들이 많아 북적이던 할인매장과 달리 아까 내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직원분이 혼자 옷을 정리하고 계시니 미안한 마음도 들고 환불할 용기가 안 나서 그냥 그대로 지나쳐버렸다. 에구.. 나의 충동구매로 인해 일주일 안에 다시 환불을 하러 가야겠다. 사람 맘은 왜 이리 수시로 바뀌는 걸까.
바지만 잔뜩 산 종이가방을 한 손에 들고, 한 손은 우산을 받치고 드디어 뉴코아를 나섰다. 충동구매에서 해방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도 여전히 비가 제법 내렸다. 어제의 선선한 날씨와 달리 오늘은 좀 쌀쌀하고 춥게 느껴졌다. 가을이 깊어지나 보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여러 번 소리를 질렀다. 꺄악! 나무가 많은 흙길 옆 보도블록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옅은 갈색에 누가 봐도 지렁이인 굵고 기다란 지렁이에 징그러워서 혼자 허걱하고 놀랐다. 또, 고동색 얇은 나뭇가지인 줄 알고 밟을 뻔했는데 지렁이였다. 지렁이도 의식의 흐름 따라 비 맞으러 나왔나 보다. 비 오는 날에 지렁이가 많이 나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길에 소풍 나온 듯이 지렁이가 많아서 혹시라도 밟을까 봐 흠칫흠칫 하며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살 빠지면 입으려고 했던 옷들, 누가 줬는데 언젠가 입겠지 했던 옷들, 낡고 해졌지만 편해서 자꾸 입었던 옷들, 사놓고 잘 안 입고 고이 모셔두었던 옷들을 꺼내 다 정리했다. 언젠가 입겠지 했지만 옷장 속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옷을 치우고 나니, 옷장도 여유가 생기고 내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졌다. 묵힌 감정도 그때그때 버리면 이렇게 편해질 텐데 말이다.
오늘 나의 MBTI는 P였다. 난 J인 줄 알았는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쓰다 보니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