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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계일주 Oct 12. 2023

인연

일상 05.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고3 수능이 끝난 겨울방학이었다.


겨울방학 그즈음부터 우리 집에는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받는 사람은 다 한결같이 ㅇㅇㅇ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 앞으로 온 편지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많은 편지는 누가 보낸 것일까.




손바닥만 한 작은 책에는 노래 목차와 악보가 그려져 있고 노래 가사도 씌어 있다. 책 맨 뒤편에는 '펜팔 친구해요'라는 제목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신청자들로 보이는 펜팔 친구를 구하는 이들의 이름, 지역, 나이, 성별과 자기소개가 양쪽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ㅇㅇㅇ 지역/ 17세 /여  진정한 친구 구해요


"언니, 이거야~! 이 책 때문에 편지가 많이 온 거야. 설마 내가 당첨되겠어라는 마음으로 신청했는데 진짜 내 이름이 실릴 줄이야. 나도 놀랐어."



낭만적인 라디오 별밤 사연 신청도 아니고, 전국 팔도에 사는 사람들이 다 보는 노래책 펜팔난이름과 나이, 주소까지 실리게 하는 신청을 하다니. 얘는 대체 제정신인 건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름 정성껏 자기 살아온 소개와 그림과 시 등을 꾹꾹 눌러 담아 보내온 노란색, 파란색, 꽃무늬 등 형형색색의 편지. 그냥 흰 봉투에 담긴 편지. 카드에 쓴 편지 등 다양했다. 편지량이 많다 보니 한꺼번에 다 읽기도 어려웠다. 동생은 편지가 너무 많아서 언니가 몇 개만 답장을 대신 써달라고 했다.


편지를 읽다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동생인 척 답장을 보낸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열일곱 살 동생은 동생대로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고, 열아홉 살 나는 열일곱 살 여동생에 빙의되어 답장을 쓴다. 답장을 안 보낸 편지도 있었으므로 여러 차례 편지가 오고 가자 수북이 오던 편지는 겨울방학이 끝나고, 3월이 오자 이제는 거의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1997년 3월, 나는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학교생활도 적응해야 되고 여동생이 빙의되어 마지막까지 편지를 주고받던 군인 아저씨에게 펜팔을 그만해야겠다고 마지막 글을 썼다.


사실은 저는 ㅇㅇㅇ의 언니였고, 집으로 온 많은 편지들의 답장을 일일이 쓸 수 없어 대필을 해줬었다고. 이제 겨울방학도 끝나고 새로운 학교생활도 해야 해서 바빠질 것 같다고. 그동안 본의 아니게 속이게 돼서 죄송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시 군인 아저씨에게 답장이 왔다. 동생이 아니어도 된다고 어차피 편지는 언니랑 주고받은 거 아니냐면서 펜팔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 생활이 너무 바빠지자 더 이상 펜팔에 시간을 낼 겨를이 없어졌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군인 아저씨는 편지를 자꾸 보냈고, 그러던 중 4월 초에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계속 오는 편지에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아빠의 사고 소식을 쓰고 더 이상 펜팔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생략)...











2021년.


나는 부부 싸움을 할 때마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분노의 하소연을 한다.


"야!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책임져~!"


"그래.. 맞아. 다 내 탓이야. 언니, 미안해 ~~~"


여동생은 형부는 어쩜 그러냐고 안 되겠다며 그때 괜히 언니를 펜팔에  끌어들여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인연인지 악연인지는 더 살고 볼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군인 아저씨는 남의 편이 되었다.


2021.10.1  꿈꾸는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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