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꾸는 일상 Oct 12. 2023

인연

일상 05.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고3 수능이 끝난 겨울방학이었다.


겨울방학 그즈음부터 우리 집에는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편지가 오기 시작했다. 받는 사람은 다 한결같이 ㅇㅇㅇ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 앞으로 온 편지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많은 편지는 누가 보낸 것일까.




손바닥만 한 작은 책에는 노래 목차와 악보가 그려져 있고 노래 가사도 씌어 있다. 책 맨 뒤편에는 '펜팔 친구해요'라는 제목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신청자들로 보이는 펜팔 친구를 구하는 이들의 이름, 지역, 나이, 성별과 자기소개가 양쪽 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ㅇㅇㅇ 지역/ 17세 /여  진정한 친구 구해요


"언니, 이거야~! 이 책 때문에 편지가 많이 온 거야. 설마 내가 당첨되겠어라는 마음으로 신청했는데 진짜 내 이름이 실릴 줄이야. 나도 놀랐어."



낭만적인 라디오 별밤 사연 신청도 아니고, 전국 팔도에 사는 사람들이 다 보는 노래책 펜팔난이름과 나이, 주소까지 실리게 하는 신청을 하다니. 얘는 대체 제정신인 건지.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나름 정성껏 자기 살아온 소개와 그림과 시 등을 꾹꾹 눌러 담아 보내온 노란색, 파란색, 꽃무늬 등 형형색색의 편지. 그냥 흰 봉투에 담긴 편지. 카드에 쓴 편지 등 다양했다. 편지량이 많다 보니 한꺼번에 다 읽기도 어려웠다. 동생은 편지가 너무 많아서 언니가 몇 개만 답장을 대신 써달라고 했다.


편지를 읽다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내가 동생인 척 답장을 보낸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열일곱 살 동생은 동생대로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고, 열아홉 살 나는 열일곱 살 여동생에 빙의되어 답장을 쓴다. 답장을 안 보낸 편지도 있었으므로 여러 차례 편지가 오고 가자 수북이 오던 편지는 겨울방학이 끝나고, 3월이 오자 이제는 거의 손에 꼽을 만큼 줄어들었다.







1997년 3월, 나는 스무 살 대학생이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학교생활도 적응해야 되고 여동생이 빙의되어 마지막까지 편지를 주고받던 군인 아저씨에게 펜팔을 그만해야겠다고 마지막 글을 썼다.


사실은 저는 ㅇㅇㅇ의 언니였고, 집으로 온 많은 편지들의 답장을 일일이 쓸 수 없어 대필을 해줬었다고. 이제 겨울방학도 끝나고 새로운 학교생활도 해야 해서 바빠질 것 같다고. 그동안 본의 아니게 속이게 돼서 죄송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다시 군인 아저씨에게 답장이 왔다. 동생이 아니어도 된다고 어차피 편지는 언니랑 주고받은 거 아니냐면서 펜팔을 계속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 생활이 너무 바빠지자 더 이상 펜팔에 시간을 낼 겨를이 없어졌다.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군인 아저씨는 편지를 자꾸 보냈고, 그러던 중 4월 초에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는 계속 오는 편지에 마지막으로 돌아가신 아빠의 사고 소식을 쓰고 더 이상 펜팔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생략)...











2021년.


나는 부부 싸움을 할 때마다 여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분노의 하소연을 한다.


"야!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책임져~!"


"그래.. 맞아. 다 내 탓이야. 언니, 미안해 ~~~"


여동생은 형부는 어쩜 그러냐고 안 되겠다며 그때 괜히 언니를 펜팔에  끌어들여 미안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인연인지 악연인지는 더 살고 볼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서 군인 아저씨는 남의 편이 되었다.


2021.10.1  꿈꾸는 일기

매거진의 이전글 이사 가는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