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06. 그렇게 모르고 싶었다
어제오늘 유난히 졸리다. 커피를 마셔도, 사탕을 먹어도. 갑자기 왼쪽 다리에 뜨거운 물 흐르는 증상이 생겼다. 오랜 치통도 한두 번씩 나타나고. 여전히 맵거나 기름진 음식을 폭식하면 보란 듯이 체한다. 일상이 늘 반복되어 별일 없는 것처럼 지내는 줄 알았는데 일기를 쓰며 생각하니 틈틈이 별일이 있었다.
아침마다 들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아줌마에서 새로운 청년으로 바뀌었고, 꼬마김밥 사장님이 딸네 집에 다녀오느라 닫았던 가게를 열었다. 찬바람이 불자 길거리에 붕어빵 아줌마가 장사를 시작하셨다. 아침마다 주차하는 언덕길에는 누가 심은 것처럼 갑자기 코스모스가 한들거렸다.
3주 전쯤이었다. 후진하는데 갑자기 내 차에서 높은음으로 삐~~~~~~~~! 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는 뒤에 사람이 지나가거나 장애물이 있을 때 후방감지기에서 띠. 띠. 띠. 띠. 나던 소리가 내가 후진하는 동시에 삐~~~~~~! 하는 소리가 지속되니 시끄럽기도 하고 불편했다.
남편이 내 차 뒤쪽을 확인해 보니 후방감지기 부품이 떨어져 구멍이 보인다고 했다. 난 매번 타고 다녀도 몰랐는데. 아무튼 내 딴에는 소리 나는 거 외에 괜찮으니 그냥 타고 다녔다. 수리비가 걱정돼서였다. 여름휴가에, 어머니 생신에, 연이은 추석 연휴에, 사이사이 낀 행사에 들어간 목돈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었다. 시끄럽지만 조금 미뤄두었다.
지난주 토요일이었다. 그날도 후진 기어를 넣고 뒤로 가는 동시에 삐~~~~~~~~!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무언가에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사고였다. 주차하다가 남의 가게 앞 국기봉을 박은 것이다. 헉. 이게 뭐람. 뇌에 지진이 났다. 멘탈이 바사삭 부서졌다.
가까이서 봤을 땐 살짝 기울어진 줄 알았는데 멀리서 보니 국기봉이 쓰러진 것처럼 가게 외부 벽에 닿아있었다. 주차해 놓은 내 차를 누가 긁고 간 적은 여러 번 있었어도 내가 사고를 낸 적은 처음이라 당황했다.
우선 사고 현장 사진을 찍고, 가게 오픈 시간에 맞춰 전화를 드렸다. 사고 난 상황을 설명드리고 죄송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보험처리 가능하니 연락 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아직 국기봉이 휘어진 걸 못 봤다며 확인하고 연락을 주신다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셨다. 내가 막상 사고의 가해자가 되니 심장이 빨리 뛰었다. 3일 후 보험 처리해 달라고 전화가 왔고, 나는 보험사 측에 사고 접수를 했다. 그렇게 주차 사고는 마무리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금쪽이 남편은 1~2만 원 정도면 고칠 텐데 미루지 말고 카센터에 가라고 했다. 나도 또 사고가 나면 안 되니 카센터에 가서 수리 견적을 받았다. 뒤 범퍼 뜯는 공임비 5만 원, 부품비 2만 원, 접합비 1만 원. 총 8만 원이었다.
카센터 사장님이 혹시 차 사고 난 적이 있는지 물었다. 웬만하면 부품이 그냥 떨어지지 않는다고 사고 난 적이 없다면 다른 차가 치고 간 거라고 했다. 시간을 되돌려봤다. 남편이 후방 감기지가 떨어져 구멍이 보인다고 한 지는 내가 주차하다가 국기봉 사고를 내기 훨씬 전이었다.
그렇다면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 차 후방감지기는 다른 차가 사고를 내서 떨어진 것이었다. 나 참 무디다. 바보 같다. 아니 사고가 났었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다른 차들이 내 차를 긁고 간 흔적이 많아서 그게 언제 적 긁힘인지 알기 어려워 전혀 몰랐다. 세상 물정 모르는 건 남편이 아니라 나였다. 진작 고쳤으면 추가로 후진하다가 사고도 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내 차가 꼭 무딘 나 같았다. 언제 긁혔는지도 모르는 상처를 그냥 두었다. 긁힌 마음을 다시 따지기도 뭣하고, 상처 난 부위를 내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알레르기 물질을 접촉하지 않고 회피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 사람과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거나 비슷한 상황은 피해 갔다. 그렇게 모르고 싶었다. 몸이 아플 때도 그랬다. 허리가 조금씩 신호를 보내와도 괜찮겠거니 했다. 집안일도 하고 마트에서 장 본 무거운 짐들도 번쩍번쩍 들었다. 그렇게 모른 척 지나치면 될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앉기도 눕기도 힘들어 한동안 고생했다.
봄이는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있고 운동을 안 해서 그런지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니까 평소에 걷기 운동 좀 틈나는 대로 하고 비스듬히 앉지 말랬지 하면서 아무 소용없는 잔소리를 해댔다. 왜 그랬을까. 육아책과 강연에서 배운 아이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공중에 사라졌다. 내 감정만 앞서 나왔다. 봄이는 엄마의 잔소리에 이제 무뎌진 것처럼 그냥 듣기만 했다.
여름이는 태권도 대회 연습으로 허벅지 근육을 다쳤다. 운동을 좋아해서 태권도를 계속하다 보니 발목 인대가 가끔 삐끗하기도 하고 허벅지 근육이나 무릎이 다칠 때도 있다. 이번에도 조심했어야지라는 잔소리 공격이 나오려는 걸 겨우 목구멍으로 넘겼다.
가을이는 공교롭게 가을이 생일날이 수학여행을 가는 날이었다. 올해 생일파티는 집에서 안 하고 친구들과 할 거라고 당부하고는 수학여행 가는 날 아침 현관 앞에서 큰 트렁크와 함께 '엄마 나 간다'하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신이 나서 떠났다. 이 세상에 저 혼자 태어나서 저 혼자 큰 줄 아는 것처럼.
겨울이는 남자아이라 발도 금세 큰다. 6개월에 한 번씩 운동화를 사야 한다. 대체로 사이즈가 안 맞기 때문이다. 여름내 크록스를 신다가 찬바람이 불어 운동화를 꺼내보니 봄에 신던 운동화가 안 맞는다. 신발을 새로 사야 하지 않겠냐고 하니 아직 크록스 신는 게 좋다며 안 사도 된다고 한다. 역시 엄마의 주머니 사정을 미뤄주는 건 겨울이뿐인가.
2023.10.13 꿈꾸는 일기